내 슬픔이 사라지고 난 뒤에야 겨우 나밖의 슬픔을 돌볼 여유가 생기는 게 보통인 인간에게는 읽을수록 낯설고 어떤 인간성을 관통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제의 선창기도, 영매의 주술문,
낭송자의 후렴이 다르지 않다. 그 슬픔이 이미 사라졌으니 나의 슬픔 또한 그리되길 바란다는 기원은 무엇보다 그 슬픔과 나의 슬픔이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을 뿌리로 갖는다. 후렴구의 아름다움 역시 그런 관계성에서 기인한다. 나 밖의 슬픔과 나의 슬픔을 매개하는.
시인은 원래 그런 존재인지도 모르겠고.
견딘다는 게 종종 후렴구를 만드는 일 같았다. 반짝이는 사탕 껍질을 모으는 것처럼. 어디가 어떻게 손상되었는지 정확히 모르면서 복구와 치료, 재생만을 떠올리는 시간을 위한 후렴구는 ‘오랜만이었다. 뭘 하든 오랜만이 되었다. 혼자 외출을 하는 것도 오랜만,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도 오랜만, 살고 싶어진 것도 오랜만, 누군가와의 관계를 끊은 것도 오랜만. 마치 몇 년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유배되어 있던 사람처럼. 고작 몇 개월이었을 뿐인데. 그러나 내 후렴구는 나를 무엇과도 연결하지 못했다. 그저 나의 몸을 사샤의 털공처럼 동그랗게 말아두는 주술의 힘이 아주 조금 있을 뿐이었다.
다른 후렴구가 필요했다. 이왕이면 보라색 후렴구가 그런 마음도오랜만이었다.- P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