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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버지가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 결국 공부를 하기 위해서 가난 집을 떠나 가톨릭 선교사의 집에 거처하며 공부를 한다. 그곳에서 독실한 신앙을 가지며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기업도 이루고, 신문사까지 경영한다. 그는 나름 여러 곳에 기부도 하며 지역 사회와 종교 공동체에서 존경받는 리더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영 다른 모습이다. 아내와 두 자녀인 아들과 딸에게 복종을 강요하고, 아버지의 자랑거리가 되기를 원한다. 딸이 반에서 1등을 놓치면 불과 같이 화를 내고, 자신의 종교적 관습을 조금이라고 어기면 아들과 딸, 심지어 아내에게까지 폭력을 가한다.
이 정도 이야기를 하면 대략 그려지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힘겹게 공부해서 성공을 이루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7-80년대의 한국 아버지상을 떠오르게 된다. 그런데 앞에서 묘사하는 인물은 한국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아프리카 중서부의 나이지리아라는 나라의 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치만다 응고지 아다치에의 소설 [보라색 히비스커스]의 주인공 캄빌리의 아버지 유진의 모습이다.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나이지리아를 대표하는 여성작가인 아다치에의 첫 소설이자, 그의 자전적 소설이다. (물론 어디까지가 창작이고, 어디까지가 저자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캄빌리는 과자와 음료수 공장, 그리고 언론사까지 소유한 성공한 아버지를 두고 있다. 그는 가톨릭 신자로서 아직 나이지리아 토속 종교를 버리지 못한 아버지와는 인연을 끊을 정도로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아내와 자녀들에게까지 강요한다. 당연히 사춘기인 오빠 자자는 그것을 거부하고 이로 인해 아버지와의 갈등이 심해진다. 또 한 번 반에서 1등을 놓친 캄빌리에게도 아버지를 다시는 실망시키지 않기를 강요한다. 그럴 때면 캄빌리의 아버지는 항상 자신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고, 자녀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지를 강조한다.
너는 내가 왜 그렇게 너랑 오빠한테 최고만 주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하니? 너는 이 모든 특권을 누리는 만큼 뭔가를 해야만 해. 하나님이 너에게 많은 것을 주셨으니 기대하시는 것 또한 많단 말이다. 하나님은 완벽을 기대하셔. 나한테는 제일 좋은 학교에 보내 주는 아버지가 없었다. 우리 아버지는 나무와 돌을 신으로 섬기며 세월을 보냈지. 선교단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이 아니었다면 난 오늘날 아무것도 아니었을 거야. 나는 이 년 동안 교구 사제의 심부름꾼이었단다. 그래, 심부름꾼. 학교에 데려다주는 사람은 없었어,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매일 13킬로를 걸어서 니모에 갔지. 성 그레고리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여러 사제들의 정원사였고 말이야. (P 64)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아버지가 강요하는 방식으로 종교생활을 하고 공부를 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것을 어기면 어김없이 폭력을 행사한다. 음식을 먹지 않는 공복재의 기간에 캄빌리가 몰래 음식을 먹다가 아버지에 걸린다. 그것을 엄마와 오빠가 감싸주다가 함께 아버지의 폭력에 노출된다.
"악마가 셋 다한 테 심부름해 달라고 한 거야?" 아버지의 입에서 이보어가 튀어나왔다. "악마가 내 집에 텐트를 쳤나?" 아버지가 어머니를 돌아봤다. "당신은 가만 앉아서 애가 공복재 어기는 걸 모고만 있었어, 미카 은디니?" 아버지가 천천히 벨트 버클을 풀었다. 몇 겹의 가죽으로 만든 무거운 벨트에 차분한 색 가죽을 씌운 버클이 달린 것이었다. 그것은 먼저 오빠에게, 어깨를 가로질러 내려앉았다. 그다음에는 두 손을 들어 막는 어머니의 위팔, 성당 갈 때 입은 블라우스 스팽글 달린 부푼 소매로 싸인 위팔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내가 그릇을 내려놓는 순간 내 등에 내려앉았다." (P 131)
이렇게 폭력을 행사한 후에는 꼭 딸을 안고 많이 아팠냐고 묻는다. 캄빌리는 이런 아버지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자신은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아버지를 절대로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말하는 종교적 관습뿐만 아니라, 반에서 1등을 해서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그런 캄빌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준 사람은 그녀의 고모인 이페오마이다. 이페오마 고모는 같은 가톨릭을 믿으면서도 캄빌리의 아버지와 달리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자녀들도 그렇게 교육을 시킨다. 그녀와 오빠 자자는 이페오마 고모의 집에 열흘간 머물며 고모가 보여주는 자유로운 세상을 맞본다. 그리고 아버지가 만든 세계가 전부가 아님을 안다. 그로 인해서 아버지와의 대립이 더 극단으로 이어진다.
이 소설은 나이지리아의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나이지리아는 영국의 식민지로 있다가 2차 세계대전 후 독립했다. 그러나 아프리카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여러 민족들의 갈등과 정치적 대립으로 자주 군부의 쿠데타가 계속해서 일어났다. 이 소설 역시 정확히 어떤 쿠데타인지를 이야기하지 않지만, 독재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정권을 잡은 세력은 캄빌리의 아버지의 신문사를 억압하고, 비판적인 사설을 쓴 기자를 암살하기도 한다. 이런 폭력적인 정권의 시대와 함께 또 한편으로 폭력적인 캄빌리의 가정의 모습이 함께 묘사된다. 놀라운 것은 이런 묘사가 마치 우리나라 7-80년대의 상황과 너무나도 비슷하다는 것이다. 사회의 폭력과 가정의 폭력이 당연시되고, 그 속에서 항상 폭력을 통해 군림하는 지도자가 있는 것까지 너무나 닮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아다치에를 페미니즘 소설가로 생각한다. 실제로 그녀가 페미니즘에 대해 강의한 유튜브 강의는 550만의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그녀를 굳이 페미니즘 소설가라는 테두리 안에 가두어 두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그녀의 소설은 폭력의 시대, 폭력이 당연시되는 시대에 그 폭력 속에서 벗어나 자아를 찾아가는 한 여성의 성장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아버지의 폭력에 희생되는 것은 캄빌리와 캄빌리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오빠 자자도 마찬가지였다. 나이지리아에도 가부장적인 문화가 존재했고, 그 문화 속에서 여자와 자녀들을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받고 있었다. 소설은 이런 나이지리아의 문화와 독특한 종교적 권위가 존재하는 가정 속에서 어머니와 오빠, 그리고 캄빌리가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독립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런 캄빌리의 가정의 모습은 한국의 가정의 모습과 닮아있다. 한때는 아버지의 폭력을 당연시 여기는 때도 있었다. 아버지이니 당연히 아내와 자녀들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고, 그것이 아버지의 당연한 권리로 여기는 시대가 있었다. 맞는 아내나 자녀들 중에는 남편이나 아버지가 사랑하기에 폭력을 휘두른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이런 폭력은 단순히 가정에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학교에서 군대에서, 심지어 국가 안에서 이런 폭력이 정당화되었다. 리더나 지도자는 당연히 그렇게 폭력을 행사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런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위대한 리더나 지도자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가정에서 사회에서 이런 폭력과의 힘겨운 싸움이 있은 후에야 우리 사회가 조금씩 그 폭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있다. 물론 아직도 우리가 싸워야 할 것들을 많이 있다. 아다치에의 소설에서 말하는 페미니즘이란 여자가 남자와 싸우는 것이 아닌, 이런 가부장적인 폭력과의 싸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지금 이 시대에 아다치에의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