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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조각을 가지고 올게요

 

 

 

우리는 날아올랐다. 그날 우리가 본 건 무엇인가? 우리의 것이 아닌 나라,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별빛, 다시 돌아오지 않는 나날. 우리는 한계를 넘어서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산산이 부서지기를, 한계라도 경험하기를, 무엇도 얻지 않고 무엇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우리는 차가운 불꽃, 타오르는 불의 중심에서 흔들리는 푸른 불꽃을 원했으나 결국 청춘이 지나고 우리 두 손에 남는 건 아버지의 유품뿐이었다. (「마지막 롤러코스터」p.70)

 

 

서너 살만 더 어렸어도 이 책의 리뷰는 스무 살 회상의 일색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아니다. 물론 나도 스무 살이 그리울 만큼 나이를 먹은 것 같다(고 말해도 될까). 그렇게 치면 나는 스물다섯 살에도 스무 살이 그리웠다. 긴가민가 와중에 결론짓길 문창과 초년생일 때 이 책을 읽은 것 같다(중요한 건 아니지만). 이 소설집은 언제부터 절판이었나. 내가 읽었다고 생각한 건 문예지에서 읽은 표제작인가(라고 말하기에 두번째 작품도 읽은 것 같고). 중요치 않다. 아니, 좀 중요한 지도 모른다. 나는 죽지도 살지도 못할 때 온다던 서른을 넘긴 지 몇 해 안 됐고, 평균 수명에 빗대 인생의 절반을 살지 못했으니 재독은 의도하지 않는다. 기억의 소멸은 알츠하이머 환자 못지 않지만 아직은 질보다 양, 깊이보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관계로 재독을 철저한 계산 끝에 하고 싶은데(그러나 철저할 것까지는 없다), 기억하지 못해 공식을 깨다니.

 

어떤 의미로든 새 작품이 수록되었으니 아예 헛수고는 아니지만 나는 분명 당시 지금보다 더 젊은 작가군에 속하던 김연수의 작품이 지금보다 훨씬 수가 적을 때, 창작연도 별로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독서를 계획하며 읽었다. 15년 만의 개정판이니 2000년판 책이 도서관에 있었을 것이다. 표제작 「스무 살」의 첫문장이 유명해서 느끼는 기시감인줄 알았는데 확실히 다니던 대학 중앙 도서관 긴 나무 테이블에 앉아서, 공강 시간이던가 수업 후던가 수업 땡땡이 중이던가 하여튼 읽었다. 내가 다닌 학교는 캠퍼스가 세 개였다. 그중 한곳에서, 어쩌면 모두 수업중인 고요한 캠퍼스 안 벤치 하나에 혼자 앉아있었을지도 모른다(그런 청승과는 아니었는데). 한일 월드컵이 열리던 해 대학 신입생이 되었다. 새삼, 있지도 않은 캠퍼스 거니는 낭만을 얘기하려는 건 아니고, 이 책이 그 기억 속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다는 얘기다. 스스로가 신기하게도, 학과특성상 나와있는 국내작가의 단편을 섭렵하던 시절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 채 개정판을 새 책 보듯 펼쳐버리고 말았지만 아무렴 어때, 소설집 『스무 살』은 정확하게 그(작가)의 스무 살과 나의 스무 살을 반추하니까. 그게 뭐 어떻다는 말인가. 엄마 등에 업혀 거리를 지날 때 나던 인근 대학가 희미한 최루탄 냄새가 기억난다 해서 그와 나의 스무 살이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같을 수가 있냐면, 딱 이만큼 살아보니 그렇다. 스무 살은 어차피 스무 살이고, 놀랍게도 스무 살은 모두 비슷하다.

 

 

이제 스무살에 찾던 미지의 세계를 떠올리는 것보다 당장 오늘내일이 더 시급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아 가슴이 약간 저릿해 온다. 거창한 미지의 무엇보다는 저녁 메뉴, 퇴근 후의 삶, 내일 반납해야 하는 책 해결, 시도때도 없는 졸음, 은근한 추위, 바다를 갈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별 것도 아니고 남는 것도 없는 사소한 선택이 더 중요해져버렸다. 빈곤한 추억은 분명 가난함의 반증이지만 근거도 맥락도 없이 갑자기 과거를 불러오는 사람이 사치덩어리처럼 보이고, 오지 못할 미래를 꿈꾸는 사람이 잉여 돋는 어리석음으로 여겨질 때가 있다. 나이 육십에도 남자(남편)와 손 잡고 다니는 여자로, 꿈꾸는 소녀로 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는데. 하지만 많은 것을 모르는 줄 알았고 또 실제로 몰랐던 스무 살에도 온 삶이 별처럼 찬란하지 않다는 걸 알았으면서, 가장 평범한 삶이 제일 행복하다는 걸 이제는 알면서. 내려놓는다. 또다시 『스무 살』을 읽는 일은 없을 것이다. 스무 살은 그런 거니까. 원할 때 오지 않고 원하지 않을 때 와서 어느덧 홀연히 가버리는 어젯밤 꿈 같은 시간.

 

 

 

 

 

 

 

 

 

 

 

 

 

 

 

 

 

내가 기억하는 김연수는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라서(물론 소설집 네 권과 장편 두 권을 더 읽은 전력이 있긴 하지만), 요즘 '내가 좋아하는 소설(을) 애인(에게) 읽히기' 프로젝트 중이라서 빌렸는데 일주일째 우리 집에 있어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하고 다시 읽어본다. 비슷한 크기로 『원더보이』도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성장소설이 별로인 나는 소년이 주인공인 소설치고는 거의 유일하게 꼽는다. 묘하게도 <상속자들>에 인용될 때 『원더보이』를 읽었고, <남자가 사랑할 때>에 인용될 때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읽었다. 어쩌다 보니, 『꾿바이, 이상』이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읽던 대학 시절에 기대만치 이 작가를 못 읽어낸 경험이 저려서 멀리하다 기회가 되었던 것뿐. 작가의 팬덤이 짙어서 한국문학의 현재 범주는 김연수를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도 있을 것 같지만, 만약 이 현상이 (오래된) 감성을 소중히 하는 사람과 오글거려 하는 사람으로 나누는 데 성공한다면, 그때는 이미 이쪽과 저쪽의 거리는 너무 멀어 만날 수 없어져버릴지도.

 

속도를 더 올리자, 당장 터질 것처럼 엔진은 굉음을 내기 시작했고 핸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는 두 손에 힘을 줬다. 나는 몸의 중심을 잡았다. 일단 속도에 익숙해지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머물러 있는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 있었다. 그곳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지나쳐갔다. 아버지도, 집도, 좌절도, 슬픔도, 시간도, 공간도. 지상에는 그런 곳이 없었다. 거긴 시속 백오십 킬로미터로 달리는 오토바이 위에 앉아 있어야만 찾을 수 있었다. 그게 어떤 것이든 다 지나가는 곳. 때로는 검은 뼈의 형상으로, 어두운 구름의 움직임이나, 가끔은 한꺼번에 흩날리는 푸른 꽃잎처럼, 모든 것은 지나갔다. (「뒈져버린 도플갱어」 pp.165-166)

 

스무 살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어른이었고, 또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유치했다. 무엇을 생각하든 항상 그이상이었다. 누군가 스무 살이 이러저러했다고 말한다면 그 모든 것들이 스무 살일 것이다. 불확실성, 불투명성, 막막함, 고독, 때론 희망까지도 괴로웠으니까. 그리고 분명한 사실 한 가지. 소설집 『스무 살』은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 수록 재미있다. 십대에 꿈꾼 것처럼 진짜 스무 살은 매혹적이지도 황홀하지도 않았고, 스무 살에 꿈꾼 서른이 또 그것과 다른 것처럼, 모든 것들이 뒤로 갈 수록 반드시 더 좋지만은 않다는 걸 아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실 하나 더.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던 스무 살 그리고 서른이 눈깜짝할 새 와서 지나가듯, 지금 이 시간도 언제든지 간다, 가고 있다. 스무 살이 지나면 스물 한 살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는 걸 이십대에 알았던 작가처럼, 지나가는 그리고 다가오는 모든 내가 나라는 것을 나도 안다. 스무 살과 함께 걷는 사람이 있고 스무 살을 죽이고 걷는 사람이 있으며, 스무 살을 잊지 못하는 사람과 스무 살을 지나와서 다행이라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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