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는 집중력과 기억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상대에게 답답함과 짜증을 느껴온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노화란 어쩌면 자신이 혐오했던 모습으로 퇴화해가는 고통과 저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스쳐갔다.
- P212
"저도 전에 루시랑 유치원 때 이야기를 한 적 있었거든요. 같이 얘기하면 생각이 더 잘 나요. 그리고 다음번에 다시 얘기할 때까지 잘 안 잊어버리는 것 같아요."
"그래. 누군가가 기억하면 그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 거지."
- P247
이혼이나 경제적 곤란이 이런 식으로 배제와 고립의 조건이 되는 거였나 그 실감이 새삼스러웠다. 다음 순간 깨달았다. 그 다른 세계가 규정하는 정상성의 압박으로부터 경선을 보호하기 위해 다은이 해야 했던 일들. 그리고 그처럼 힘든 상황에서도 경선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거나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는 것. 과연 그것이 경선이 다은에게 원했던 독립적이고 담대한 태도였을까. 경선은 자신이 다은에게 준 것이 결국 고독의 가시나무 관이었다는 걸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울기 십상이라는 결혼식장에서 경선이 눈물을 참은 순간이 있었다면 바로 그때였다.
- P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