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존 엘리지의 <47개의 경계로 본 세계사>를 읽으며 떠오른 생각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국경선들이 얼마나 우연적이고 자의적인 산물인지에 대한 놀라움이었습니다. 지도 위의 얇은 선 하나에 수천 년의 권력과 전쟁, 정체성과 분열의 이야기가 응축되어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면서도 매혹적입니다.
"어떤 경계도 필연적이거나 영원하지 않다. 경계는 자의적이며 우연적인 결과물이고, 많은 경우 단 한 번의 전쟁이나 조약, 혹은 지친 유럽인 몇 명의 결정이 달랐다면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수도 있다."
저자 존 엘리지는 도시 전문 웹사이트 CityMetric을 창간하고, 지도와 경계를 주제로 한 팟캐스트 Skyline을 기획하고 진행해온 영국의 저널리스트입니다. 경계선이 어떻게 인간의 본성을 반영하는지에 대한 통찰이 인상 깊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최초 국경부터 시작하여, 만리장성의 통합적 역할, 그리고 유럽이 아시아와의 구분을 위해 설정한 대륙의 선까지. 초기 역사 부분에서 저자는 경계가 물리적 방어막을 넘어서 정체성 형성의 도구였음을 보여줍니다. 지리적 경계가 문화적 우월감과 어떻게 결합되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칭기즈칸의 개방 국경 정책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혁신적입니다. 경계를 폐쇄의 도구가 아닌 소통의 통로로 활용했던 몽골 제국의 사례는 경직된 국경 개념에 익숙한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선사합니다.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와 중동에 그어놓은 무책임한 경계선들에 대한 분석은 익히 들어본 바 있을 겁니다. 아프리카 대륙을 의미 없이 조각 내고 자연스러운 일체감을 무시한 채 선을 그어버렸습니다. 저자는 경계선이 어떻게 공동체의 자연스러운 결속을 파괴하고 인위적인 분열을 만들어냈는지 보여줍니다.
사이크스피코협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1916년 중동을 자로 긋듯 나눈 이 비밀 협정은 민족, 종교, 언어를 무시한 채 오직 제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었고, 현재까지도 중동의 복잡한 분열 구조를 낳는 근본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한반도 분단을 다룬 챕터도 등장합니다. 저자는 "K-팝과 〈오징어 게임〉을 만들어내는 점점 더 부유해지는 남한과, 고립적이고 공산주의적이면서도 신정체제적인 북한, 그리고 두 국가를 가르는 국경선은 북위 38도선을 따라 형성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라며 한반도 국경에 대한 흔한 오해부터 짚어줍니다.
한반도를 가르는 38선의 형성 배경과 실제 경계가 일치하지 않는 현실, 그리고 동서 냉전의 상징이 된 베를린 분단의 이야기는 경계가 불러온 이데올로기적 분열을 극명히 보여줍니다.
저는 이 책의 후반부에서 다루는 현대적 경계 개념의 확장이 특히 신선했습니다. 배타적 경제수역, 위성 궤도 배치 경쟁, 달의 안전지대를 둘러싼 외교적 수사까지 인류는 경계의 개념을 우주로까지 확장시키고 있습니다.
1967년 세계 대다수 국가가 서명한 우주조약은 우주 탐사를 '모든 국가의 이익을 위해 이루어져야 하며 인류 전체의 영역'으로 규정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평화적 목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한 정의를 제시하지 않았기에 그 가치가 제한적이다"라며 이런 이상적인 조약도 결국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있음을 짚어줍니다.
저자는 경계선들이 인간의 야망과 불안은 물론 경계 너머를 두려워하는 나약함까지 반영한 사회적 구조물이라고 정의합니다. 미국 디트로이트의 사례를 통해서는 도시 내부에서도 작동하며 확장과 축소, 인종 차별과 경제적 배제가 보이지 않는 경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확장에 대한 집착과 탐욕, 그리고 인종 차별과 배제의 심리가 어떻게 도시의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47개의 경계로 본 세계사>는 이제 지도 바깥을 상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금껏 그려온 선들은 어디까지 유효하며, 앞으로 어떤 기준과 가치로 새로운 경계를 그려나가야 할까요?
"처음 보는 공존의 지도를 만들 수도, 긴 시간 이어져온 분열의 지도를 되풀이할 수도 있다"라고 말합니다. 기술과 자본이 맞물리는 현대에서 경계는 더 이상 지도 위에 그려진 선에 머무르지 않고, 첨예한 전선이자 미래를 향한 주도권 싸움의 출발점이 되고 있습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히말라야 국경을 둘러싼 인도와 중국의 충돌, 예루살렘과 가자지구를 둘러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무력 충돌 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지도 저변에 흐르는 지정학의 숨은 규칙을 읽어내야 합니다.
<47개의 경계로 본 세계사>는 해독 능력을 기르는 데 유용한 책입니다. 47개 경계의 탄생과 변화를 통해 역사, 자원, 안보, 정체성이 교차하는 실질적 힘의 경계가 어떻게 세계 질서를 형성하는지 보여줍니다. 경계선에 숨겨진 인류 욕망을 엿보는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