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넷플릭스 『탄금』으로 K-사극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장다혜 작가가 이번엔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한 의학 서스펜스를 들고 왔습니다. 소설 <탁영>은 죽은 자를 묻는 매골자 출신 백섬과 금박을 새기는 금박장 희제와의 운명적 만남을 그린 작품으로, 조선판 CSI라 불릴 만한 의학 드라마와 애틋한 멜로, 특히 진저리쳤을 정도로 완벽한 서스펜스를 버무린 수작입니다.
'누군가에게 그림자를 맡긴다'는 뜻의 '탁영托影'이라는 단어는 낯설었지만, 조선이라는 익숙한 배경 속에서 사회의 음지와 의료의 어두운 이면, 인간 욕망의 끝을 극적으로 풀어내고 있어 흥미진진하게 읽은 소설입니다.
시체를 묻는 매골자로 살아왔던 백섬은 조선의 수어의 최승렬의 집 노비로 팔려가게 됩니다. 구곡재라 불리는 외딴 별채에서 지내게 된 백섬은 금박장 희제, 최대감 댁 차남 장헌과 동갑내기로 인연을 맺게 됩니다.
<탁영>은 아리따운 스토리는 아닙니다. 인간관계, 정치적 음모, 의술의 비윤리성까지 확장되는 과정이 휘몰아칩니다. 궁중 암투와 의학 미스터리를 절묘하게 배합해 장르적 쾌감이 치솟습니다. 게다가 조선의 하층민 직업들이 많이 묘사되어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를 엿볼 수 있습니다.
<탁영>에서 가장 복합적인 악인은 차남 장헌입니다. 아버지를 따라 의술의 길에 들어선 장헌은 백섬과 희제의 관계를 참지 못한 채 제대로 흑화하는 인물입니다. 조선 최고의 의관이 되기를 자명한 사실처럼 받아들이고, 희제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정의라고 착각할 때 인간은 가장 잔인해지는 법이다." - p210
장헌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의술, 연모라는 이름 아래 벌이는 폭력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합니다. 정당화된 폭력이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지 그 광기의 끝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백섬은 삶의 가장 밑바닥에서 살아온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금박 장식이라는 고운 일을 하는 희제를 만나며 운명은 새로운 방향으로 향합니다. 무엇보다 희제의 여성상이 참 멋집니다. 누군가의 그늘이 되길 거부하고 세상의 모든 것과 대적할 기세로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평생 시체를 묻으며 살아온 백섬이 수어의 최대감 댁의 노비로 팔려가게 된 건 우연이 아니라 치밀하게 계획된 필연이었다는 게 드러나면서 사건은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출생 조건 때문에 백섬이 최대감 댁의 인간 부적으로 들어왔다는 게 표면적 이유라면, 그 뒤에는 더욱더 무서운 비밀이 있었습니다. 미신적 설정으로 생각하며 읽다가 그게 다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읽는 내내 소름이 돋습니다. 구곡재에서 백섬이 받는 융숭한 대접의 이면에는 섬뜩한 진실이 숨어있습니다.
<탁영>은 사랑과 복수를 두 축으로 삼습니다. 희제는 연모를 두려워하고, 백섬은 욕망 없는 사랑을 선택하며, 장헌은 모든 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이들의 관계를 통해 삶의 본질, 인간의 그늘, 권력의 무게, 감정의 민낯을 정교하게 해부합니다.
미스터리라는 장르적 재미와 함께 인물들 간의 복잡한 감정선이 읽는 재미를 배가시킵니다. 특히 칼두령이라는 캐릭터는 감초 역할을 제대로 합니다. 엉뚱미가 있어 매력적인데다가 백섬만큼이나 순정미 갖춘 인물입니다.
시대극이지만 대사가 어색하지 않고 찰져서 음성지원이 되는 느낌으로 재미있게 읽은 소설입니다. 결말에 이르를수록 마음은 침잠해지지만 그렇기에 더 기억에 남는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