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점심시간에 커다란 오렌지를 하나 샀어 – 그 크기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지.”
영국 현대 시인 웬디 코프(Wendy Cope)의 대표작이자 동명의 시집 『The Orange』의 핵심 정서를 함축한 「오렌지」 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찬란하게 기념하는 동시에, 그 무엇도 당연하지 않은 시대에 평범한 하루가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지를 보여주는 시입니다.
시집 <오렌지>에는 총 31편의 시가 수록되었습니다. 유수연 시인의 감수로 정제된 번역본과 웬디 코프 특유의 리듬감과 유머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영어 원문으로 구성되어 있어 좋았습니다.

“그 오렌지 덕분에 너무도 행복했어,
평범한 일들이 종종 그렇지,
특히나 요즘에는. 장을 보는 일도. 공원을 거니는 일도.
모든 게 평화롭고 만족스러워. 새삼스럽게도.” – 「오렌지」 중에서
이 시는 도시적 고단함 속에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평범한 기쁨을 상기시킵니다. 커다란 오렌지를 사서 나눠 먹는 일, 그 단순한 행위에서 비롯된 감정이 하루를 평화롭게 만든다는 것. 이런 기쁨의 발견을 우리는 평소 얼마나 많이 지나쳐버렸을까요. 바쁘게 지나쳐버리는 삶의 디테일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시입니다.
오렌지는 작은 행복의 은유입니다. 이 책이 특히 2030 세대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꿈보다는 “그냥 좀 행복하고 싶다"라는 욕망, 그것을 시인은 다정하게 받아들이고 포용해 줍니다. 지금의 세대가 겪는 정서적 피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제는 안전하게 정착할 사람을 찾았으니,
인생에서 단 하나의 야망이 있다면, 바라건대
계속해서 지루하게 지낼 수 있기를.” – 「지루하게 지내기」 중에서
이 시는 평범함에 대한 예찬입니다. 웬디 코프는 드라마틱한 삶이 아닌, 반복적이고 지루할 수 있는 일상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안정과 평온을 사랑합니다. 무한 경쟁 속에서 지친 우리들에게 이보다 더 솔직하고 절실한 ‘야망’이 또 있을까요?
「가볍게 더 많이 써 봐」 시는 웬디 코프의 유머러스하면서도 자조적인 시선이 잘 드러난 작품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노력은 더 이상 성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심리상담도 받고, 이것저것 배워보고 (...) 좋은 음식을 챙겨 먹고, 군것질은 줄여. 담배는 피우지 않고, 술은 멀리해. 그런데도 달라지는 건 없어, 앞날은 깜깜해.” – 「가볍게 더 많이 써 봐」 중에서
마치 일기장을 슬며시 들여다본 듯한 느낌입니다. 너무나 현실적인 고백이 오히려 위로가 됩니다. 웬디 코프가 '당신만 그런 게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한결같이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을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가 가득합니다. 『오렌지』에 실린 시들은 비범한 상황이나 격정적인 사건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대신 평범함을 장난스럽게 예술로 승화시키는 힘이 돋보입니다.
작가 특유의 리듬감을 원문으로 확인해 보기도 합니다. 오랜만에 영시를 낭독해 보니 새삼 이런 시간이 행복감을 선사하는구나 싶더라고요. 잊고 있던 기쁨 감각을 되돌려주는 작은 처방전과도 같은 시집입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괜찮고, 남들보다 앞서지 않아도 좋으며, 우리가 느끼는 불안과 지루함도 삶의 일부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웬디 코프의 시는 유쾌하게 망가져도 괜찮다고, 평범하게 살아도 충분하다고 말해주는 다정한 속삭임입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의 하루를 지탱해 주는 힘은, 그 오렌지 한 알일지도 모릅니다. 지루한 하루에도 반짝임은 있다는 것. 그걸 시로 쓴다면 이런 모습일 겁니다.

귀염뽀짝한 오렌지 꾸미기 스티커로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시집이 완성됩니다.
단순하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는 순간을 포착하게 일깨워 준 <오렌지>. 복잡한 수사와 난해한 은유 대신, 일상의 언어로 고민과 불안, 그리고 소소한 기쁨을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