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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가 겁도 없이 정한 신혼여행지는 쿠바였다. 물론 엄청난 비행기 삯을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유럽으로 바꿨지만. 하지만 지금도 무척 아쉽다. 뭐라 딱 꼬집어 말하기는 힘들지만,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그렇듯이, 쿠바는 왠지 굉장히 매력적인 관광지일 것 같다. 우선은 우리와 삶의 룰이 다르다는 점에서 그렇겠지. 자본주의를 어느 정도 벗어나 있는 인간의 삶은 어떠한지, 그래서 행복할 거라고 여겨지는 부분이 진짜 그런지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다.
중미라는 점에서도 그런 것 같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체 게바라! 촌스러운 이유일지는 모르지만, 그곳에서는 모퉁이만 돌면 체 게바라의 초상을 만날 수 있다 하니, 체 게바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나로서는 꼭 가 보고 싶은 곳이다.

... 아내가 식탁에 아침 식사를 준비해 놨다. 쌀밥 반 공기, 김칫국, 계란찜, 명란젓 두 토막, 그리고 몇 가지 나물들을 하얀 도자기 그릇에 담아 차린 정갈한 아침상이다. 마치 가지런한 아내의 모습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꽤나 생각날 것이다. 오늘 이 밥상은....

어라, 부푼 기대를 안고 넘긴 책은 첫장부터 분위기를 깬다. 미술 하는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저자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데, 이 사람 왠지 좀 불안하다. 처음부터 나는 인생을 날로 먹는 놈이라고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남편이 긴 여행을 떠나는 날 아내가 아침상을 챙겨 줄 수도 있다. 그것은 아름다운 장면이다. 그러나 그걸 받아든 남편의 서술에서 그들 생활이 늘 이런 식이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가지런한 아내의 모습 같기도 하다"는 대목에서 그 혐의가 매우 짙어진다.

유쾌하지 않은 첫 인상은 그 후에도 쭉 이어진다. 우선, 문장이 좋지 않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하는 서경식 씨의 책(<소년의 눈물>)을 읽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사람의 문장은 너무 수식이 많다. 열 손가락에 열 개의 반지를 낀 것 같다. 거실 벽에 어울리지 않는 액자를 덕지덕지 붙여 놓은 것 같다.

'예쁜 글'을 쓰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글은 오히려 더 미워진다. 글의 승부는 무엇을 쓸 것인가, 어떤 관점으로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는가에 달렸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수식으로서 글을 치장하려고 들면 어쩔 수 없이 문장에 덧칠을 할 수밖에 없다. 안 해도 될 말을 꾸역꾸역하게 된다. 필요없는 말을 줄줄이 늘어놓다 보면 '사끼'가 느껴지게 된다. 그런데 '예쁜 글'을 쓰고자 하는 유혹은 너무 강하다. 사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나도 그런 유혹에 시달리고 있다. --;;

어쨌든, 일본을 거쳐 캐나다를 경유하여 멕시코에서 하바나행 비행기로 갈아 타려는 이 아저씨, 비행기에 탑승하기는 했는데, 예쁜 일본 스튜어디스를 보고 마치 영화 <설국>에 나오는 여주인공 같이 예쁘게 생겼다느니 하는 망언을 하다가 별 궁굼하지도 않은 일본 문화에 대해 온갖 잘난 척을 한다. 그 재수 없음은 캐나다의 공항을 경유할 때, 캐나다에서 영어 연수를 받고 있는 초등학생 딸내미 생각이 났다는 대목에서 절정을 이룬다.
슬슬 걱정이 된다. 이 아저씨, 쿠바에 가서 어떤 작태를 보일런지.

...솔직히 말해 줄리엣이 이고르의 말처럼 그렇게 예뻤다면 아무리 힘들더라도 밤 늦게까지 같이 놀았을 텐데, 나는 노이에게 음료수를 사먹으라고 2달러를 주었다. 미안했지만 어서 호텔에 가서 쉬고 싶은 생각만 자꾸 들었다. 힘없이 돌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이내 호텔 안으로 들어왔다. 와, 해방이다...

놀랍다. 이 아저씨의 순진무구한 마초 근성은 둘째치더라도 여행지에서 만난 원지인에게 단지 그들이 매우 곤궁하게 생활하고 있으며 달러에 반환장한다는 이유로 좀 미안한 대목에서는 달러를 쥐어 주는 저 황당한 거만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 아저씨의 이런 작태는 계속 이어진다. 마음에 드는 쿠바인, 좀 미안한 일을 한 쿠바인, 불쌍해 보이는 쿠바인에게 모두 2달러에서 5달러에 이르는 돈을 쥐어 준다. 지가 먼데.
이 아저씨의 오만함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질 않는다. 점포만 부족한 게 아니라 물건도 턱없이 부족하다. 진열돼 있는 상품들이 별로 없다. 신발 가게엔 달랑 신발 몇 켤레뿐이다. 채소 가게엔 빈 채소 박스만 썰렁하게 구석에 쌓여 있을 뿐 정작 채소 좌판은 초라하다. 쿠바는 유기농으로 유명하지만 식량을 100%자급자족하는 것으로도 세계에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엔 100% 자급자족일지라도 풍족하게 보이진 않는다. 나 같은 보통 사람은 상대적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고 살고 있는 환경에 따라 인식의 지배를 받게 마련이 아닌가. 한국의 백화점에선 농산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이 당연하 ㄴ광경이니, 그런 모습에 익숙한 우리로선 당연히 쿠바의 야채 가게는 그야말로 옹색히다...

...식료품 가게에서 물 한 통을 사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 끝에 서서 기다린다. 성질 급한 한국인의 한 사람인 나로서는 정말 견디기 힘든 시간이다. 답답해서 뛰쳐나가고 싶지만 달리 도리가 없다. 그래도 물은 먹어야 되니까. 젠장. 제기랄, 투덜거리면서 사 가지고 오던 물을 반이나 마셔 버렸다. 여러 통을 샀어야 했는데 무거울까봐 안 샀더니...

나는 대략 이런 류의 사람은 가급적 여행을 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행을 위한 기본이 안 되어 있는 것 아닌가. 쿠바는 쿠바인 나름의 생활이 있다. 필자의 말대로 쿠바는 농산물 100% 자급자족에 대부분(정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전량) 유기농 생산을 하고 있다. 이는 미국의 경제 봉쇄 정책 이후 마련된 식량 자급자족 정책 때문이다. 훌륭하지 않은가? 나는 어떤 면에서는, 쿠바의 이런 모습을 보며, 백화점에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 그래서 음식에 대한 경외심을 일찌감치 버린, 우리의 모습을 반성해야 한다고 본다. 나는 적어도 그럴 것 같다. 내가 보기엔 쿠바인들의 모습이 훨씬 올바르다. 그런데, 이 아저씨, 삶의 인식 운운하면서 그 앞에서 투덜거리기만 한다. 이런 사람은 돈 있어서 쿠바에 가고, 덴장할!

아저씨의 가소로운 잘난 척은 마지막까지 화려하게 장식한다.
...전시장을 지키던 한 쿠바 여인이 내게 말을 걸어 왔다. 지금까지 전시장에서 동양인을 본 적이 없어서일까, 경비원이 ㄴ그녀는 우리들을 관심 있게 지켜본 모양이다. 그 다음 이어지는 질문들이 문제였다. "이렇게 큰 미술관이 당신네 나라에도 있나요? 마티스, 피카소, 반다이크 같은 거장의 작품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할 말이 없었다. 경제적 빈국이라는 쿠바의 미술관엔 놀랍게도 마티스, 피카소는 물론이고 렘브란트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가슴이 무겁다. 대답을 유에게 떠맡기고 나서 슬며시 돌아서고 말있다. 우리네 문화의 현 주소는 어디인가? 알고 있는가,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가를. 그것이 두렵다...

우리가 왜 마티스며 피카소, 렘브란트의 작품을 소유해야 하는지 나는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것은 단지 문화의 다양성 때문이다. 쿠바는 스페인 등 남부유럽의 지배를 받았으며 현재의 인종도 그에 상당히 영향을 받은 분포도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서양 예술이 한편으로는 자신의 예술일 수 있으며(물론 이것도 일부이다. 그들에게는 유구한 인디오의 유산도 있다.) 무엇보다 예술을 중시하는 사회주의 국가의 전통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물론 우리의 문화적 가치를 보존하는 센스나 시스템 등이 매우 부실한 것은 사실이나 이런 식으로 서술해서는 안 된다.

그밖에도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굉장히 많았다. 하지만 오직, 쿠바에 가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끝까지 읽었다. 다 읽고 나서도 개운치 않지만, 쿠바에 가면 어디서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의 공연을 볼 수 있는지, 어디를 꼭 가 보고 싶은지 정도의 정보를 알게 된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꼭 쿠바에 가 보고 싶다. 그리고, 가기 전에 인식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 쓴 쿠바 여행기를 꼭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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