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중립 화장실
우리 동네 노동인권센터 독서모임에서는 모인 사람들끼리 윤독을 통해 책을 읽는다. 지금까지 여러 책을 읽었고, 최근에는 우리 동네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의 주치의와 상무이사가 함께 쓴 책인 [나이 들고 싶은 동네] 라는 책을 읽고 있다. 올해 대의원 총회에서 참석한 대의원들에게 이 책을 나눠줬기 때문에 나도 이 책을 받아서 몇몇 꼭지를 읽었었다. 이 모임이 이뤄지는 공간은 다양한 동네 모임이 열리는 동네 사랑방 같은 공간이고, 나는 주로 퇴근 후 저녁 시간에 이 공간에서 책상 한 쪽에 노트북을 펼쳐 놓고 일을 하거나 글을 쓰곤 한다. 지난 모임(아마도 약 3주 전쯤) 날에도 내가 저녁때 일을 하는 동안 이 책 모임이 열렸고, 참가자들이 각자의 목소리로 이 책을 낭독하는 것을 들었었다. 익숙한 사람들의 별명들(살림의료사협에서는 별명을 활동명으로 쓰고 있음)이 들렸고, 내가 대략 알고 있던 이야기들이 들리기도 했다. 물론 내가 잘 몰랐던 이야기들도 있었고, 아예 모르는 사람들도 등장했다.
오늘도 퇴근 후 저녁을 먹고, 이 사무실에 와서 내일 오전에 열리는 회의를 위해 회의 자료를 만들고 있는데, 또 책 모임이 열렸다. 사실 어느 정도의 소음이 있어도 집중해서 일을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데, 내가 잘 아는 인물에 대한 내용이나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이야기가 자꾸 들리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자꾸만 참가자들이 낭독하는 책 내용으로 정신이 팔렸다. 태양광 발전소 수익분석 자료를 만들어야 해서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시간인데, 자꾸 정신이 저쪽으로 팔려가 버려서 자료를 만들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결국 이 모임이 아예 끝난 후에 집중해서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바꿔먹고, 알라딘에 들어왔다. 이왕 들어온 김에 이 이야기나 써야겠다.
아까 들었던 내용은 성중립 화장실을 만들어 이용하는 내용이었다. 생각해보니 몇 해 전에 살림의원에 들렀을 때 화장실을 갔더니, '여성 전용 화장실' 하나와 '성중립 화장실' 하나, 이렇게 두 개의 화장실이 있었다. 순간 좀 당황했다. 남성은 어디를 써야 하나? 여성 전용은 당연히 쓸 수 없을 것이고, 그럼 성중립 화장실을 쓰란 뜻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아주 짧은 시간 당황하기는 했지만,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살림의료사협은 창립하기 전부터 여성주의 의료생협을 표방한 곳이었고, 의원 개원 이후 여러 성소수자들이 일부러 멀리서도 찾아오는 곳이라고 들었었다. 성소수자들 입장에서는 여성과 남성 이렇게 둘로만 나눠진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이 어려웠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여기까지 글을 쓴 후에 참가자들이 모임을 마쳤다. 그 중 친한 분들과 잠시 대화를 나누느라 글쓰기를 중단했고, 이후엔 급한 일이었던 자료 만들기에 집중했었다. 그리고 날짜가 지났다. 이 글을 이어쓰는 지금은 다음날 아침이고, 새벽까지 자료를 만들다가 잠깐 쉰 후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지만, 새벽에 집중해서 일을 하면서 긴 시간 고민해도 풀리지 않았던 답을 찾아서 기분이 좋아졌고, 오히려 컨디션은 어제 밤보다 더 좋은 것 같은 기분이다. 물론 오후엔 운전을 해야 해서 이 글을 다 쓴 후와 이따 오전 회의를 마친 후에는 조금씩 더 쉴 예정이다.
암튼 어제 쓰던 글을 조금 더 이어 쓰자면, 저 성중립 화장실이란 개념이 사실 그리 어렵지는 않을텐데,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하고 불편한 개념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달에 열린 어느 총회에서 인권재단이 운영하는 회의실을 대관해서 썼었는데, 거기 화장실도 아예 남녀 라는 개념이 없이 성중립 화장실 혹은 모두의 화장실 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그래서 한 어르신이 나에게 어느 화장실을 가야할지 모르겠다고 물어보셨다. 나는 그냥 어디든 다 들어가셔도 된다고 성별 구분없이 누구나 쓸 수 있는 화장실이라고 설명드렸다. 여전히 그 어르신은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지만, 발길을 돌려 가까운 화장실을 향해 가셨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그 어르신은 여성 화장실이란 표시가 있어야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암튼 저 책에는 살림의료사협이 운영하는 살림의원과 살림치과가 초기부터 두어곳의 건물을 옮겨 다니며, 건물주의 눈치를 보고, 구조상 리모델링이 가능한 방식을 찾아가며 어떻게든 성중립 화장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과정과 그 이후 직원들(의료진과 활동가)과 방문자들(환자와 보호자) 모두 쉽게 적응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과정을 담고 있다.
사실 어제 이 글을 처음 시작할 때에는 저 책 모임이 조금 더 오래 이어질거라고 생각해, 이 성중립 화장실 이야기에 이어 최근 매일 제법 긴 거리를 운전하며 느꼈던 몇 가지 이야기들, 특히 전쟁으로 인해 갑자기 고유가 시대가 되어버린 이 상황에서 업무상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하는 상황 등을 두드려 보고 싶었지만, 일단 이 글은 여기서 마무리하자. 다음에 더 많은 경험을 담아 풀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