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각
아주 오랜만에 총각이란 단어를 들었다. 흰머리가 늘어나고, 흰수염이 늘어난 후로는 한번도 듣지 못했던 말이다. 아마 그 할머니께서 눈이 안 좋아 내 얼굴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하신 말씀이겠지. 근데 총각이라 부르기 전에는 내 긴 머리칼을 보고 "여자여? 남자여?" 라고 말씀하셨다. 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은 머리가 길면 여성이라는 편견을 갖고 산다. 특히 어린이들과 어르신들이 더 그런 듯하다. 매장에 배송 물품을 가지러 가서, 여러 개의 상자를 겹쳐 올려놓고 스쿼트 자세로 짐을 번쩍 들어올렸는데,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신 어르신이 하신 말씀이었다. 짐을 들고 일어나서 차에 물건을 실으러 가면서 내가 답했다. "여자면 어떻고 남자면 어때요? 짐 옮기는 일은 남녀 모두 잘 할 수있는 일인데요." 할머니는 내 목소리를 듣고 나서 "총각이 힘이 좋구만." 이라고 말씀하셨다. 할머니께 아이가 대학생이예요. 라고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갈 길이 급해서 그저 매장 담당자님께 인사를 드리고 차에 올랐다. 오늘부터 담당하는 매장 하나가 바뀌었다. 내가 맡은 세 개의 매장은 가장 배송이 적은 곳 두 곳과 배송물량이 보통인 매장 한 곳이었는데, 가장 적은 한 곳이 다른 사람에게 가고, 대신 배송물량이 좀 많은 매장 하나가 나에게 배정되었다. 만약 세 매장이 모두 배송 건이 많은 날이 겹치면 정말 정신없이 바쁜 날이 될지도 몰랐다. 다행히 매장을 바꾼 첫 날이었던 오늘은 모든 매장에서 배송 건 자체가 적었다.
운전
96년 1월에 운전면허를 땄었다. 실기 시험을 칠 때 S 코스 후진으로 나오다가 아무래도 선을 밟은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차를 멈췄다. 어쩔줄을 몰라 가만히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나는 아슬아슬하게 선을 밟기 전이었고, 다른 코스에 있던 응시자가 선을 밟아서 탈락 안내가 나왔는데, 나는 내가 밟았다고 착각한 것이었다. 결국 나는 시간 초과로 떨어졌다. 그 다음 시험에서 합격했다. 한번 떨어져보고 나니 훨씬 더 편안한 마음으로 시험에 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면허는 땄지만, 대학 시절에는 차를 운전할 일이 거의 없었다. 큰 슈퍼마켓에서 일을 할 때는 새벽에 열리는 농산물 시장에 물건을 사러 가기도 했고, 아주 가끔 배송을 다니기도 했지만, 그 일을 계속 했던 것은 아니었으니. 제법 오랫동안 운전을 안 하고 살다가 다시 운전을 본격적을 한 것이 결혼하고 큰 아이가 태어났을 때였다. 그 당시 우리 가족은 부천에 살고 있었고, 우리 부부는 모두 서울로 출근을 했다. 아이는 장모님께 맡기는 날이 많았다. 장모님께서 봐주시기 어려운 날엔 아내가 사무실에 데리고 나갔고, 그것도 어려운 날엔 내가 데리고 출근하기도 했다. 기저귀와 분유병과 분유통 등이 든 큰 가방을 차에 싣고, 아기를 데리고 장모님 댁에 들러 아기를 맡기고 출근했다. 퇴근할 때는 장모님 댁에서 아기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기를 데리고 운전을 했기 때문에 조심조심 천천히 다녔다. 원래는 그리 느긋하게 운전을 하는 편은 아닌데, 나 혼자가 아닌 누군가 다른 사람을 태우고 운전을 할 상황이면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조심히 운전을 하는 편이다. 오랫동안 아이들을 데리고 운전을 해온 습관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배송 일을 맡아 하면서 초반에 그렇게 좀 느긋하게 운전했더니, 도저히 정해진 시간 안에 일을 마칠 수가 없었다. 어쩌다 배송 건수가 많은 날에 앞의 매장에서 조금 오래 걸렸더니, 뒤쪽 매장들에서 계속 전화가 왔다. 왜 안 오시냐고? 그날 깨달았다. 적어도 혼자 배송하는 때만이라도 부드럽게 운전하는 습관을 버려야하겠구나. 마침 그때쯤 배송 일을 오래 해온 선배 한 사람이 매장들을 함께 돌아주며 본인이 어떻게 하는지, 어떤 길로 다니는지 등을 알려주셨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고 예전에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을 하셨던 어르신들 댁으로 농활을 함께 가면서 번갈아가며 운전을 했던 기억도 있어서, 이 분이 평소 운전을 좀 거칠게 하는 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분이 운전대를 잡고 다니는 동안, 내가 매장들을 돌고 배송을 다녔던 시간들보다 확실히 빠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날 이후로 나도 평소 운전 습관에서 조금이라도 시간이 더 걸리는 것들을 없애나가고 있다. 그리고 확실히 빨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대신 예전에는 앞 차가 조금 천천히 다니더라도, 가끔 초보 운전이라고 써붙인 상태로 좀 어이없는 행태를 보여도 그냥 느긋하게 기다려줄 수 있었는데, 요즘은 그럴 수가 없다. 지금은 도로 위의 1분 1초가 아까워 나도 모르게 조바심을 내곤 한다. 확실히 도로 위에서 운전으로 먹고 사는 일은 쉽지 않다.
기다리던 책이 왔건만, 잠시 펼쳐본 후로 다시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이제 4월이 되었으니, 조금은 시간 여유가 생기겠지. 이젠 시간이 많지는 않더라도 짧게 짧게라도 책 읽은 여유가 생기겠지. 얼른 이 글을 마치고 다음 일정으로 이동해야 한다.
노트북을 켜자마자 잠깐 페이스북에 들어갔는데, 트럼프가 죽었다는 기사가 있더라. 순간 놀랐으나, 곧 오늘이 만우절이구나 깨달았다. 이젠 정확히 몇 년 전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언젠가 만우절에 돌연사 했던 지인이 생각났다. 아, 안된다. 오늘은 슬픈 감정에 빠져들 여유가 없는 날. 오늘 일정 다 마치고 나중에 밤에 그 지인을 떠올리던가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