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가보지 못한 길

켈로이드


며칠 전에 북플에서 '지난 오늘' 글들을 읽다가 5년 전쯤인가 켈로이드로 고생했던 시기에 쓴 글을 읽었다. 그때 그 글에도 강조해서 썼었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온 몸 여기저기에 흉터가 정말 많은 편인데, 켈로이드라는 단어 자체를 그 당시에 처음 들었다. 그러니 당시 처음 방문했던 무척 불친절한 의사가 말한 것처럼 내가 켈로이드 체질일 리는 없었다. 다행히 두 번째 찾아간 우리 동네 의료협동조합 주치의가 자세히 설명해주셔서 무릎 같은 관절 부위나 상처가 무척 크고 넓은 경우에는 그럴 수도 있다는 점을 이해했었다. 


그때 처음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았던 경험을 쓴 글에 댓글이 많이 달렸었다. 켈로이드가 잘 낫지 않고,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은 후에 조금 크기가 줄어들고 낫는 듯 하다가도 안 맞으면 다시 심해지기도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켈로이드 때문에 긴 시간 고통받고 있다는 등의 댓글들이 있었다. 또 스테로이드 주사 외에 연고 형태의 바르는 약에 대한 정보를 주신 분도 계셨다. 그 댓글들 덕분에 나는 켈로이드라는 생소한 현상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두번째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으러 가서는 연고를 처방해달라는 요청도 할 수 있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스테로이드 주사를 약 8개월 동안 네번인가 다섯번인가 맞았다. 처방받은 연고는 1개 구매해서 딱 마지막 주사 맞을 때 즈음에 다 썼다. 그 연고의 덕분에 주사 맞는 주기가 길었음에도 빠른 속도로 흉터 크기가 줄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말 다행히도 내 켈로이드 흉터는 빠른 시간 안에 완치되었다. 이후로 다시 흉터가 커지거나 부풀어 오르지 않았다. 지금 보면 이젠 이게 켈로이드가 맞았던가 싶을 정도다. 지금은 그냥 웃으며 당시를 떠올릴 수 있지만, 그때 당시엔 좀 많이 힘들었다. 일단 흉터 크기가 무척 컸고, 부풀어 오른 정도도 무척 높아서 바짓단에 닿고 쓸릴 때마다 통증이 컸다. 살면서 무릎, 어깨, 골반 등 관절을 다쳐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던 시절이 꽤 길었다. 이 당시에도 무릎 상처 때문에 거의 6개월 동안 다리를 절면서 살았는데, 이후에 켈로이드 때문에 다시 1년 가까이를 고통 받았었다.


그때 다친 무릎이 왼쪽이었는데, 오른쪽에 비해 왼쪽 무릎은 정말 흉터가 많다. 그때 상처 이후로도 한번 더 큰 상처를 입었었는데, 이 흉터도 또 켈로이드가 되는 건 아닌가 싶어서 걱정도 많았다. 정말 다행이도 이번에는 켈로이드가 되지는 않았다. 다만 다른 흉터들 보다는 조금 부풀어 오르기는 했는데, 흉터의 크기가 그렇게 넓지는 않아서 켈로이드가 되지는 않았다고 여겼다.


새삼스레 지금 켈로이드 얘기를 하는 것은 3년 반 전에 당한 교통사고로 인해 내 옆구리에 남은 큰 수술자국 흉터들 때문이다. 언젠가 같이 목욕탕에 갔던 후배가 이 흉터를 보고 "형, 어릴 때 패싸움 하던 시절에 칼 맞은 자국이예요?" 라고 물었었다. 한때 좀 어두운 삶을 살았던 시절에 칼을 휘두르는 상대에 맞서 싸움질을 한 적은 있었으나 정말 다행스럽게도 칼을 맞은 적은 없었다. 그래서 칼을 맞은 흉터가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내 옆구리에 남은 수술자국은 길고 흉측하다. 게다가 꽤 오랜 기간동안 이 흉터도 조금 부풀어 있었다. 몸을 씻을 때마다 오돌도돌하게 부풀어 오른 흉터가 만져져서 빠르게 씻던 손길을 잠시 멈추고 다시 조심스레 손을 움직이곤 한다.


그렇게 씻을 때마다 신경 쓰이던 이 흉터들을 최근에 샤워하면서 다시 자세히 살펴보았다. 부풀어 올라있던 흉터들이 많이 작아지고 많이 낮아졌다. 켈로이드라고 할 정도로 부풀지는 않았었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일 정도이긴 했는데, 이제는 예전처럼 신경쓰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나는 켈로이드 체질은 아닌 것 같다. 다행이다.


히라가나


요즘 영어와 일본어 익히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 이런저런 다양한 언어들을 조금씩 손 댔다가 멈추기를 벌써 수년째 하고 있는데, 그 기간동안 그닥 외국어 실력이 늘지는 않았다. 사실 뭐 처음부터 외국어를 잘 하고 싶어서 손을 댄 것도 아니고 그저 재미로 조금씩 들여다보다 그만뒀다 했던 일이라 그냥 재밌게 잘 놀았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조금 욕심이 생겼다. 영어는 확실히 예전에 비해 실력이 줄었다고 느껴서 다시 좀 꾸준히 접할 기회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왔고, 기존 사용하던 여러 앱들에 더해 최근에 다른 앱 하나를 더 깔았다. 확실히 사람은 새로운 자극이 들어오면 재미를 더 느낀다. 이 새로 깐 앱이 구성 면에서는 좀 아쉬움이 있지만, 재미는 있었다. 그리고 기존 쓰던 다른 앱들도 다시 손을 대다보니 새로운 활력을 느꼈다.


일본어는 딱 계기가 된 일이 있었다. 일본 어느 대학의 환경대학원 학생들이 나를 인터뷰하러 찾아왔던 일이었다. 통역을 해주신 한국인 교수님께서 워낙 잘 해주셔서 당시 나는 영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우리 말로만 말을 했었다. 다만 그 대학원 학생 중에 이스라엘과 인도에서 온 학생들이 소수 있었는데, 그들은 영어로 소통했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 영어를 알아듣기 위해 좀 집중을 하긴 했었다. 그리고 인터뷰를 마친 후에 나에게 제일 먼저 연락을 했었던 학생과 잠시 대화를 나눴는데, 그때 나는 주로 영어로 말을 하다가 문득 일본어로 한 마디라도 말을 걸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데. 그런데. 정말 단 한 단어도 생각이 안 나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하얗게 변한 느낌이었다. 나와 대화했던 학생을 포함해 그날 방문했던 학생들 10명은 일부러 내게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등등 인사말을 우리말로 했었다. 그래서 나도 헤어지기 전에 인사만이라도 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마저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말 한마디도 못 해보고 헤어진 그들은 나중에 인스타그램과 이메일 등으로 다시 연락을 해오며 다음에 꼭 기회를 만들어서 오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인터뷰가 아니라 강의를 들으러 오겠다고 했다.


미래는 알 수 없는 일이니, 정말 그들이 다시 올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만약 다시 온다면 그때는 아주 가벼운 대화만이라도 일본어로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주 가끔 손을 대다가 멈추곤 했던 일본어를 다시 익히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살았던 부산은 일본과 가장 가까운 도시라서 그랬는지 몰라도 다양한 일본 문화를 가장 먼저 접하는 곳이었다. 지인들 중에 일본어를 공부하는 사람도 많았고, 일본어를 제법 잘하는 사람도 많았다. 나는 일부러 일본어를 공부한 적은 없지만, 일본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드라마 등을 많이 접했기 때문에 자주 쓰는 단어나 표현들은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래서 아마 영어 다음으로 잘 할 수 있는 언어가 일본어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좀 익혀보려고 마음 먹었던 것이 한 십여년 전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당시에 본격적으로 공부해봐야지 생각했다가 바로 막혔던 지점이 바로 히라가나, 가타가나를 외우는 일이었다. 뭔가 일부러 외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데다가 모양도 익숙하지 않은 이 글자들을 익히는 일이 너무 어렵게 느껴졌다. 그래서 다시 방향을 바꿔 글자는 포기하고 그냥 듣고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이나 단어를 늘리는 것으로 조금씩 하다가 말다가 했었다.


이번에 오랜만에 다시 일본어를 익히면서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부터 시작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신기하게 이번에는 새로운 글자들을 익히는 일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한번 재미를 느끼면 확실히 속도가 붙는다. 십년이 훌쩍 넘는 기간동안 외우려다 포기하기를 반복했던 히라가나를 단 며칠만에 다 외웠다. 일단 글자를 다 알아보는 단계가 되고 나니 발음으로만 알던 단어들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게 느껴졌다. 와! 이제 정말 번역되지 않은 일본 만화를 읽을 수 있는 건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직 가타가나도 외워야 하고, 무지 어려울 것 같은 한자어도 천천히 익혀야 하겠지만, 한자 위에 가나를 표기한 글이나 만화라면 읽을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무척 기분이 좋아졌다.


어떤 일이든 뭔가 확 바뀌는 계기, 어떤 변곡점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영어는 군대 제대하고 아직 휴학 중이던 시절에 회화학원을 다니며 원어민 선생님 한 명과 친해진 일이 계기가 되어서 확 늘었다. 그때는 미국이나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나는 것이 유행이었고, 하다못해 동남아로라도 연수를 다녀오던 시절이었는데, 나는 어학연수는 못 가더라도 회화학원이라도 다녀야지 생각했던 것이 뜻하지 않게 강사랑 친해졌다. 같이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고, 당구를 치러 다니고, 카페에서 수다를 떨거나 같이 장기를 두는 등 어울리다보니 어법에 맞지 않더라도 영어로 떠드는 일에 조금 자신이 생겼고, 그래서 이후로는 주저없이 영어를 말할 수는 있게 되었다. 몰론 여전히 영어를 잘 한다고 말할 정도는 못 되지만.


이번에 히라가나를 익힌 일이 내게는 일본어를 익히는 일에서 변곡점이 되는 사건이라 여긴다. 앞으로 좀 더 재미있게 일본어를 듣고 읽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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