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에 소개했다가 시원찮은 반응을 얻었던 책 중 하나이다. 대체로 이런 수박 겉읽기가 싫단다.
사실, 이 책은 철학을 본격적으로 파고들기보다, 여행기 형식에 가까운 가벼운 필치로 “철학을 일상에서 곁눈질하듯 맛보기” 하는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철학의 본질’을 기대한 분들에게는 다분히 피상적이고, 수박 겉핥기로 비쳐졌을 수 있을 것 같다.
책의 틀은 흥미롭다.
새벽 : 태어나고 자라며 배우는 시기
정오 : 삶의 한가운데서 부딪히고 실천하는 시간
황혼 : 마무리와 성찰, 떠남을 준비하는 시간
이렇게 하루의 흐름에 인생을 포개고, 각각의 국면마다 철학자들을 배치했는데, 특히 나는 황혼의 철학자들 이야기에 오래 머물게 되더라는, 삶의 무게를 더 실질적으로 건드리는 대목이기 때문일 터다. 이를테면 몽테뉴의 죽음에 대한 태도, 보부아르의 노년 성찰 같은 주제들이, 단순한 “삶의 팁”을 넘어 독자에게 실존적인 울림을 준다.
197쪽
쾌락은 의심스럽다. 쾌락은 어두운 곳에, 닫힌 문 뒤에 머문다. ‘은밀한’ 쾌락이나 ‘숨겨진’ 쾌락 같은 말을 할 때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이 인간 본능에 수치심이 깃들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쾌락을 최고선으로 여겼다. 다른 모든 것(명성과 돈, 심지어 덕까지)은 그것이 쾌락을 더 증가시키는 만큼만 중요하다. 에피쿠로스는 늘 그렇듯 도발적인 문체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명예가 있는 자와 헛되이 그들을 찬양하는 자에게 침을 뱉는다.” 쾌락은 우리가 그 자체로서 욕망하는 유일한 것이다. 그 밖의 모든 것, 심지어 철학까지도, 쾌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한 수단이다.
209쪽
톰은 모든 쾌락은 좋은 것이고 모든 고통은 나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고통 대신 쾌락을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어떤 쾌락은 미래의 고통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그러므로 피해야 한다. 폐암의 고통은 흡연의 쾌락보다 더 크다. 마찬가지로 어떤 고통은 미래의 쾌락으로 이어질 수 있고, 그러므로 견뎌야 한다. 예를 들면 운동을 하는 고통이 그렇다.
222쪽
관심을 기울이는 능력은 꼿꼿이 걷는 능력이나 피클병을 여는 능력과 더불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능력 중 하나다. 모든 눈부신 과학적 발견과 모든 뛰어난ㄴ 예술 작품, 모든 친절한 태도의 근원에는 순수하고 사심없는 관심의 순간이 있다.
살말은 자신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을 보지 못한다.
관심의 질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 어디에 관심을 기울이기로 결정했느냐, 더 중요하게는 어떻게 관심을 기울이느냐가 곧 그 사람을 보여준다. 지난 삶을 돌아볼 때 어떤 기억이 표면 위로 떠오르는가? 우리의 삶은 가장 열중한 순간들의 총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베유는 "가장 큰 희열은 가장 온전하게 주의를 기울였을 때 찾아온다."라고 말했다.
이런 드문 순간에 우리는 베유가 '극도의 관심'이라 부르고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몰입'이라고 부른 정신 상태에 진입한다.
227 ~228쪽
"다른 사람의 고통이 내 살과 영혼 속을 파고 들어온다." 시몬 베유는 썼다. 베유는 중국의 기근 소식을 듣고 눈물을 왈칵 터뜨렸다. 동료 철학자였던 시몬 드 보부아르는 이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보부아르는 이렇겍 회상했다. "전 세계에 맥박이 울리는 심장을 가진 그녀가 부러웠다."
베유는 관심을 어떤 수단이나 기법으로 보지 않았다. 베유에게 관심은 용기나 정의와 다르지 않은 똑같이 사심 없는 동기가 요구되는 미덕이었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더 훌륭한 노동자나 부모가 되기 위해 관심을 기울이지 말 것. 그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이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이유에서 관심을 기울일 것.
가장 강렬하고 너그러운 형태의 관심에는 다른 이름이 있다. 바로 사랑이다. 관심은 사랑이다. 사랑은 관심이다. 이 두가지는 같은 것이다. "불행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에게 관심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관심을 보일 수 이는 능력은 매우 희귀하고 갖기 어려운 능력이다. 그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
베유는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진 않다고 말한다. 짧은 질문 한 마디가 마음을 녹이고 인생을 바꿀 수 있다. "지금 무슨 일을 겪고 계신가요?" 이 질문이 강력한 힘을 갖는 이유가 "집합체의 한 단위, 또는 '불행하다'라는 딱지가 붙은 사회 범주의 한 표본으로서만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그저 어느 날 고통이 특별한 흔적을 남겼을 뿐인 한 명의 인간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기차역이라면 전부 좋다. 못생긴 역도 마찬가지다. 뉴욕 펜실베니아역보다 못생긴 역은 없다. 구린 역이라 해도 기차역에는 공항에는 없는, 심지어 좋은 공항에도 없는 활력이 고동친다. 기차역은 관심 기울이기를 연습하는 훈련장이다. 윌리엄 프리스라는 작가가 그린 <기차역>이라는 단순한 작품명의 그림.
"신을 사랑하기 위해 학교 공부를 올바르게 활용하는 방안에 관한 성찰"이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펼친다.
관심은 집중이 아니다. 집중은 강제할 수 있다. "얘들아, 잘 좀 들어!" 하지만 관심은 강제할 수 없다. 집중할 때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해보라. 턱에 힘이 들어가고 눈이 가늘어지며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생긴다. 베유는 이런 식으로 근육을 쓰는 게 너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관심은 생각을 유보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의 생각은 텅 빈 채로 기다려야 하고 그 무엇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저 자신의 생각에 침투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타인에게 참을성을 보이지 못하는 사람이 스스로에게 참을성을 보이는 경우는 드물다.
278
간디는 결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자기 생각을 바꾸길 겁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괴짜와 변덕쟁이, 미치광이"를 끌어 모아 그들을 전부 수용한 사람이었다. 지독한 수줍음과 자기 회의를 극복하고 한 국가를 이끈 사람이었다. 대의를 위해 기꺼이 죽으려 하되 다른 사람을 죽이려 하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대제국과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이었다. 신이나 성인군자가 아닌, 피와 살을 가진 사람으로서, 좋은 싸음이 어떤 것인지를 세상에 보여준 사람이었다.
간디는 영적 잡식동물이었다. 기독교에서 이슬람교까지 여러 다양한 종교의 별미를 맛보았지만, 결국 간디의 허기를 확실히 채워준 것은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기카>였다.
간디가 이 종교적 서사시를 처음 만난 것은 런던에서 법을 공부할 때였다. 두 영국인 신지학회 회원이 간디에게 <바가바드기타>에 대해 물었다. 당황한 간디는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때부터 세 사람은 에드윈 아널드의 영역본을 함께 읽기 시작했다. 간디는 서양으로 떠나고 나서야 동양을 발견했다.
간디는 <바가바드기타>에 푹 빠졌고 이 종교적 서사시를 '마더기타'라고 불렀다. <바가바드기타>는 간디에게 영감의 원천이자 위로였다.
285쪽
간디는 피비린내 나는 수단을 이용해 인도의 독립을 쟁취하느니 계속 영국의 속박을 받는 것이 낫다고 보았다. 간디는 "구덩이 안으로 내려가지 않고 구덩이를 팔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말했다. 다른 이를 잔인하게 대하는 사람은 곧 스스로를 잔인하게 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혁명이 결국 실패로 끝나는 것이다. 수단과 목적을 혼동한 사람은 스스로를 집어삼킨다. 간디가 보기에 목적은 절대로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했다. 수단이 곧 목적이었다. "불수난 수단은 불순한 결과를 낳는다. 정확히 뿌린 대로 거두게 되는 법이다." 유독한 땅에서 장미나무를 키울 수 없듯이, 피 붇은 땅에서는 평화로운 국가를 세울 수 없다.
루소처럼 간디도 평생을 걸었다. 루소와 달리 간디의 결음은 신속하고 결단력이 있었다. 단호한 항의의 걸음이었다. 1930년의 어느 날 아침, 간디와 80명의 추종자들은 아마다바드에 있는 간디의 아시람에서 출발해 남쪽으로, 바다로 향했다. 하루에 20킬로미터씩, 어떤 때는 그보다 더 많이 걸었다. 이들이 해안에 도착했을 무렵 80명의 추종자는 수천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간디가 아라비아해에 몸을 담근 뒤 영국 법에 대한 노골적 위반 행위로서 바다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천연 소금을 한 움큼 퍼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291쪽
파커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 나도 내가 원하는것을 얻는다. 언젠가 간디는 비폭력 운동을 유클리드의 선에 비유했다. 유클리드의 선은 길이는 있지만 폭은 없다. 여태껏 인간은 한번도 유클리드의 선을 긋지 못했고 앞으로도 긋지 못할 것이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간디의 이상처럼, 유클리드의 선 개념에는 가치가 있다.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다.
카일라스와 나는 비를라하우스 바깥의 벤치에 말없이 앉아 있다. 긴 시간을 함께한 두 사람 사이의 편안한 침묵이다. 누구도 입을 열어 침묵을 채워야 한다고 느끼지 않는다.
인도인들은 간디의 사진이 들어간 돈을 좋아한다. 그게 다다.
311쪽
"삶도 아직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말하겠느냐?" "말이 바르지 않으면 판단이 분명할 수 없다."
공자는 말을 중요하게 여겼지만 그에게 인仁만큼 중요한 단어는 없었다. 인은 <논어>에 105번 등장하는데, 그 어떤 단어보다 많은 횟수다. 이 단어의 정확한 번역어는 존재하지 않으며(공자 자신도 이 단어를 정확히 정의 내리지 않는다.), 그동안 연민, 이타주의, 사랑, 어짐, 진정한선, 온전한 행동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번역은 '인간다운 마음'이다.
인을 실천하는 사람은 공경과 아량, 신의, 민첩함, 친절이라는 다섯 가지 기본 덕목을 항상 실천한다. 물론 공자가 친절을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공자는 친절을 개인이 원할 때 베푸는 것에서 철학의 핵심 개념이자 훌륭한 통치의 근간으로 한 단계 승격시켰다. 공자는 친절과 사랑을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려놓는 첫번째 철학자였다. 공자는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보다 약 500년 일찍 황금률을 제시했다. 공자에게 친절은 무른 마음이 아니다. 약함도 아니다. 친절은 실용적인 덕목이다. 공자의 한 추종자는 모두에게 친절을 베풀면 "손바닥 위에서 세상을 뒤집을 수 있다'라고 말한다.
313쪽
노자가 공자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도 당연하다. 노자가 중국 철학계의 서핑족이라면 공자는 땍땍거리는 선생님이다.
솔직히 말하겠다. 나는 '올바른 의례적 행위'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주 조금도, 내게 의례는 반항해야 하는 것이지 수용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전통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여러 철학자들의 외침과 정면으로 위배된다. 칸트도 이렇게 말했다. "과감히 스스로 생각하라!" 하지만 의례가 유교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유교는 그보다 훨씬 더 나아간다. 유교는 생각 없이 의례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 동기가 중요하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공경 없는 의례, 나는 이런 것들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다!"
공자가 격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있다. 이 이유는 인과, 친절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친절은 자유롭게 흘러 다니는 것이 아니다. 친절은 담길 그릇이 필요하다. 공자에게는 그 그릇이 올바른 의례적 행위인 예다. 이런 예의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고 공자는 말한다. 그래도 마치 예의를 신경 쓰는 것처럼 자리를 정리하라. 마치 예의가 중요한 것처럼 정해진 규칙에 따라 식사를 하라. 이런 의례가 따분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친절은 바로 이러한 일상적 토대에서 나온다. 공자의 목표는 인성 개발, 즉 도덕적 역량을 습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효도만큼 중요한 역량은 없었다. <논어>의 매 페이지에는 부모님의 손가락질이 희미하게 찍혀 있다. 아들은 마땅히 아버지를 공경해야 하며, 아버지의 죄조차도 덮을 수 있어야 한다.
319~320쪽
우리의 타고난 친절함은 반드시 밖으로 끌어내져야 한다. 공자는 그 방법이 바로 공부라고 본다. <논어>는 공부를 칭송하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배우고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
공자의 '공부'는 기계적 암기를 뜻하지 않는다. 심지어 배움 그 자체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공자에겐 더 깊은 뜻이 있다. 바로 도덕적 자기 수양이다. 우리는 교육받은 내용을 배운다. 수양한 것은 흡수한다. 작은 친절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연민에서 나온 행동 하나하나는 곧 삼나무 씨앗에 물을 주는 것과 같다. 그 나무의 키가 어디까지 자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공자에게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정말로 인간 본성이 원래 선한 것이라면 왜 세상은 이토록 잔인할까? 친절은 우리가 발견하든 못하든 늘 그 자리에 있다. 하버드 대학의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이 현상에 거대한 비대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눈길을 끄는 한번의 악랄한 사건은 1만 번의 친절한 행동으로 상쇄될 것이다."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이런 평범한 친절이 존재하지 않거나 영웅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런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친절의 힘을 기록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거의 성ㅇ스럽기까지 한 책무라고 굴드는 말한다. 냉철한 과학자인 굴드는 선함을 기록하는 데 실용적인 이유가 있닫고 보았다. 친절으 귀하게 여기면 더욱 늘어난다. 친절함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온다. 잔인함은 학습되는 것이다. 먼지 쌓인 방 안에서 재채기를 하는 사람이 칭찬을 들을 이유가 없듯, 카일라스를 도운 나의 반사적 반응도 좋은 평가를 받을 이유가 없다.
328쪽
˝순식간에 사라지는 삶의 작은 기쁨을 즐기려면 느슨하게 쥐어야 한다.˝
나의 목록 작성은 절대로 이만큼 위대하지 않다. 내 목록은 존재를 보장하거나 문화를 이룩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한 나의 목록은 가치를 인식하지는 않지만 내가 생각을 통제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의 목록은 내가 세상을, 나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보다 더 철학적인 것이 어디 있겠는가?
P. 337
누군가는 이 말에 반대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괴로운 것은 의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넘쳐나서라고 말이다. 소셜미디어덕분에 이제는 언제든지 모두가 모든 것에 자기 의견을 내보일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의견들은 친구들에게, 전문가‘들에게, 그리고 가장 교활한 알고리즘에 크게 영향받는다. 그 결과 우리는 희뿌연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우리의 신념은 종이처럼 얄팍하다. 당신은 새로 생긴 스시집을 좋아하는가? 아니면그저 사람들이 별점을 다섯 개 줬기 때문에 좋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타지마할은 정말로 아름다운가? 아니면 인스타그램 속 황홀해하는 사진들을 보고 타지마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된 것인가? 세이 쇼나곤은 자기 렌즈가 투명하고 깨끗할 수 있도록,
자신의 생각이 온전히 자신만의 생각일 수 있도록 치열하게 노력했다.
339쪽
진정한 기쁨은 평범한 즐거움과 달리 쓰디쓴 뒷맛을 남기지 않는다. 진정한 기쁨은 오는 줄도 몰랐던 것이기에 사라져도 그립지 않다.
모든 것은 딱 좋거나 완전 글렀거나 둘 중 하나다. 1센티미터 삐끗하는 것은 1킬로미터 삐끗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수소는 이마에 흰색 털이 약간 섞여 있어야 하지만 고양이는 반드시 새까만 색이어야 한다. "하지만 고양이의 배는 예외인데, 배만은 새하얘야 한다." 음악 연주는 마음을 기쁘게 하지만 오로지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없는" 밤에만 그러하다.
쇼나곤이 진정한 기쁨이라 선언하는 것은 완벽할 필요는 없지만 반드시 알맞아야 한다. 분위기와 계절에 어울려야 한다. 본질에 들어맞아야 한다. 그러므로 "여름은 극도로 더울 때가 최고이며, 겨울은 지독히 추울 때가 최고다."
쇼나곤은 자신의 모든 감각을 활용하지만 그중에서도 후각을 가장 많이 쓴다. "소가죽으로 만든 안장 끈의 낯선 냄새가 불현 듯 풍길 때"와 "한낮에 희미한 땀 냄새가 나는 살짝 폭신한 기모노를 걸치고 몸을 웅크린 채 낮잠을 잘 때" 기쁨을 느낀다. 옷에 향을 입힐 수 있도록 나무로 특별 제작한 "향 옷걸이"를 사랑한다.
P. 340
그때나 지금이나 많은 일본인이 그렇듯 쇼나곤은 사쿠라, 즉벚꽃을 무척 좋아했다. 벚꽃은 순식간에 져버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삼 일쯤 만개했다가 다 떨어져버린다. 다른 꽃(예를 들면 매화)은 훨씬 오래 피어 있다. 어째서 그렇게 연약한 것을 피우려고그토록 애를 쓰는 것일까?
P. 341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그 불확실성이다. 14세기 승려 요시다 겐코吉田兼好가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만개한 꽃보다 막 꽃이피어나려는 나뭇가지, 시든 꽃잎이 떨어진 정원에 관심을 더 많이 쏟는다고 말한다. 벚꽃은 그 짧은 수명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짧은 수명 때문에 사랑스럽다. 일본 연구자인 도널드리치는 ˝아름다움은 덧없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한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삶의 작은 기쁨을 즐기려면 느슨하게 쥐어야 한다. 너무 세게 붙잡으면 부서져버린다. 사람들이 소로에 대해서 한 말은 쇼나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소로는 대상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그것을 꽉 붙잡거나 이용하거나 남김없이 파악하려 하지는 않는다.
P. 345
이 시대의 일본인은 관념적인 추론보다 미적 경험을 더욱 귀하게 여겼다. 보는 방식, 듣는 방식, 그리고 당연히, 냄새를 맡는 방식이 무엇을 아는가보다 더 중요했다.
헤이안 일본은 모든 예술을 높이 쳤지만 그중에서도 시가 가장으뜸이었다. 인생의 모든 중요한 사건에는 늘 시가 있었다. 출생과 연애, 심지어 죽음까지도, 헤이안 시대의 존경받는 신사는 작별의 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훌륭한 시를 쓰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얻거나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시를 못 쓰는 사람은 무자비하게 조롱당했다. 아름다운 시를 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포장도 아름답게 해야 했다. 당신이 970년의 교토에 살고 있다고, 그리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낵 ㅗ싶다고 상상해보자. 어떻게 하겠는가?
먼저 종이를 골라야 한다. 아무 종이나 골라선 안 된다. "전하고자 하는 정서뿐만 아니라 계절, 심지어 그날의 날씨와 잘 어울리는 적절한 두께와 크기, 디자인, 색깔의 종이여야 한다. 그 다음에는 다양한 구성과 붓질을 실험하며 초안을 여러 번 써본다. 내용과 글씨가 마음에 든다면 널리 쓰이는 여러 방법
중 하나를 이용해 종이를 접고, 그에 어울리는 나뭇가지나 꽃잎을 동봉한다. 마지막으로 "똑똑하고 잘생긴 전달자"를 불러 올바른 주소로 보내고, 답장을 기다린다. 감사가 돌아올지 조롱이 돌아올지는 알 수 없다. 최악의 경우 무시당할 수도 있다. '읽씹'은 21세기의 발명품이 아니다.
P. 353
점심을 먹은 후 공책을 꺼내 대문자로 쓴다. 일본 탄환열차:목록.˝좋은 시작이다. 하지만 너무 광범위하다. 더 구체적일 필요가 있다. 더 작게 들어가야 한다. 일본 탄환열차에서 나를 즐겁게한 것들, 더 낫다.
1. 승무원이 복도를 미끄러지듯 걸어왔다가 몸을 회전하고, 승객을 만나자 인사하는 모습. 2. 하이힐을 신고 복도를 걸어오던젊은 여성이 아주 살짝 휘청했다가 발레리나처럼 우아하게 중심을 잡는 모습. 3. 고통스럽지 않은 기분 좋은 따뜻함을 내뿜는 단단하고 두꺼운 스티로폼 커피 컵의 감촉. 4. 컵에 영어로 ˝AromaExpress Café˝라고 쓰여 있고, ˝Aroma˝의 ˝0˝가 커피 원두 모양으로 그려져 있는 것. 5. 도쿄에 가까워질수록 풍경이 점점 도시로바뀌는데, 그 변화가 점진적이어서 도시가 급작스럽게 나타난다.
기보다는 서서히 드러나는 모습. 6.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한 화장실, 7. 기대하지 않았는데 언뜻언뜻 보이는 바다. 8. 반대 방향 기차가 정면충돌을 걱정할 새도 없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면서 내는소음. 9. 창문 위로 작은 개울과 지류들을 만들면서 마치 자기 의지가 있는 것처럼 민첩하게 움직이는 빗방울들. 접기 - ashram21
P. 362
지나친 나이스함은 지나친 초콜릿 아이스크림이나 지나친 사랑과 같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그 누구도 경험해본 적 없는 것이란 뜻이다.
P. 365
나는 니체보다 124년 늦게 실스마리아에 도착한다. 왜 니체가이곳을 좋아했는지 알 것 같다. 생강쿠키로 만든 집과 똑같이 생긴 사랑스러우면서도 우직한 집들, 맑고 차가운 공기, 그리고 눈돌리는 곳마다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알프스 산맥이 보인다. 만약 스위스에 더러운 때라는 것이 있다 해도 여기에서는 그 증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쓰레기통조차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하다.
P. 368
니체는 이곳에서 여러 대담한 발상을 떠올렸다. 여기 실스마리아에서 ˝신은 죽었다˝라며 철학에서 가장 뻔뻔한 주장을 했다.
또한 실스마리아에서 춤추는 예언자이자 자신의 또 다른 자아,
자기 지혜를 인류와 나누기 위해 산에서 내려온 가상의 페르시아 예언자 차라투스트라를 만들어냈다. 자신의 가장 위대한 사상(사상 중의 사상˝)이 상상하지 못한 흉포함으로 니체를 덮친 곳 또한 실스마리아였다.
371~372쪽
<사랑의 블랙홀>에서 매우 분노한 주인공이 말하듯, 다른 것은 좋은 것이다. 나에게는 사명이 있다. 신이 주신 사명이 아니라 니체의 춤추는 예언자인 차라투스트라가 내린 사명이다. 나ㅡㄴㄴ 니체가 처음으로 영원회귀 개념을 떠올린 곳, 그 거대한 바위를 찾을 작정이다. 그 바위를 보고 만짐으로써 그날 니체가 생각했던 것을 생각할 수 있기를, 아니, 그날 니체가 느꼈던 것을 느낄 수 있기를 희망한다.
걷고 또 걷는다. 다리가 아프다. 하지만 걷는다. 그 고통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고통 때문에 걷는다. 니체라면 내가 나의 권력에의 의지를 단련하고 장애물을 극복하며 위버맨시 (초인) 에 한 걸음씩 다가서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기꺼워했을 것이다.
"최소한 하루의 삼분의 일을 정념과 사람들, 책 없이 보낼 수 없다면 어떻게 사상가가 될 수 있겠는가."
니체의 나쁜 시력은 아무도 모르는 축복이었다. 덕분에 니체는 책의 횡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니체는 책을 읽지 못할 때 걸었다. 한번에 몇 시간씩 엄청난 거리를 걸었다. "바깥 공기를 마시며 자유롭게 이동할 때 탄생하지 않은 생각은 그 어떤 것도 믿어선 안 된다." 니체가 말했다. 우리는 손으로 글을 쓴다. 발로는더 좋은 글을 쓴다.
"모든 진실은 구불구불하다."니체가 말했다. 모든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든 것이 지난 후에야 과거를 돌이켜보며 서사를 매끄럽게 다듬고 패턴과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이 지그재그다. 여백도 있다. 과거의 자신을 막 모습을 드러낸 미래의 자신과 갈라주는 텍스트 사이의 빈 공간, 이 여백은 무언가가 누락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백은 무언의 과도기이며 우리 삶의 흐름이 방향을 바꾸는 지점이다. 니체에게는 그런 분기점 중 하나가 일찍 찾아왔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니체는 어느 날 고서점에 잠깐 들르게 된다. 그는 어떤 책 한 권에 특히 마음이 이끌렸다고 회상했다. 바로 쇼펜하우어의 걸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였다. 집에 돌아온 니체는 소파에 몸을 던지고 "그 정력적이고 음울한 천재가 나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두었다. 니체는 기뻤다. 그리고 큰 중격을 받았다.
P. 374
이런 극적인 행동으로 니체는 교수의 안정적인 생활을 방랑하는 철학자의 삶과 맞바꾸었다.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해명할 필요가 없고 그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은 독립적인 삶이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용기 있는 행동, 혹은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렇게 말한다. ˝아마 니체만큼 과거의 삶을 멀리 내던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
P. 375
아직도 니체의 "피라미드처럼 거대한 바위"를 찾지 못했고, 멈춰서 니체의 책을 읽기로 한다. 이 저항의 행위를 니체도 분명히 이해하리라. 니체의 <즐거운 학문>을 펼친다. 몇 문장을 읽자마자 니체가 내게 말을 걸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니체는 내게 고함을 치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물음표의 철학자라면 니체는 느낌표의 철학자다. 니체는 느낌표를 사랑한다! 가끔 두세 개씩 붙여 쓰기도 한다!!!!!
니체는 읽기 즐거우면서 동시에 읽기 버겁다. 니체가 읽기 즐거운 것은 문장의 명료함과 상쾌한 단순함이 쇼펜하우어에 맞먹기 때문이다. 니체는 중요한 할 말이 있는 10대의 당당한 패기로글을 쓴다. 온 삶이 글쓰기에 달린 것처럼 글을 쓴다.
니체는 철학이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니체는 장난기 넘치고, 통렬하게 웃기다. 니체는 모든 진실에는 최소한 한 번의 웃음이 따라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생각을, 문학적 장치를 가지고 논다. 아포리즘과 동요와 가곡을 쓰고, 자신의 가장 유명한 발명품인, 성서 속 인물을 가장한 차라투스트라의 목소리로 글을쓴다. 니체의 짧고 간결한 문장은 트위터와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니체가 읽기 버거운 것은 소크라테스처럼 니체도 확고한 신념에 의문을 품으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P. 378
니체가 보기에 춤추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비슷한목표를 향한다. 바로 삶의 찬미다. 니체는 그 무엇도 입증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저 독자가 세상을 바라보기를, 자기 힘으로, 전과는 다르게 바라보기를 원할 뿐이다.
마치 예술가처럼, 니체 같은 철학자는 우리에게 안경 하나를건네주며 말한다. ˝이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시오. 내가 보이는 게 당신 눈에도 보입니까? 정말 기적 같지 않습니까?˝ 과학적인 측면에서는 우리가 보는 것이 사실일 수도,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니체는 과학자가 아닌 예술가나 소설가의 진실을 보여준다. 마치 그런 것처럼 접근법이다.
384
실제로 삶의 나쁜 순간들은 좋은 순간들보다 더 무거운 것으로 보인다. 항암 치료의 고통과 비교하면 초콜릿 아이스크림이 주는 기쁨은 별게 아니다.
완전 쇼펜하우어처럼 되어 우리가 "가능한 최악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결론 내릴 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니체였다. 하지만 니체는 힘들고 너무 짧았던 자기 삶의 끝을 향해 다가가면서 인생 전체에 감사한다고 공표하고 쾌활한 다 카포를 덧붙인다. 다시 한번.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무엇을 고통스러워하는가는 우리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 우리는 니체가 말한 "본질적인 고통'을 경험하는가, 아니면 다른 것, 그에 못 미치는 것을 경험하는가? 우리는 그저 고통을 참아내고 있나? 아니면 고통을 그 자체로 소중하게 여기는가?
니체는 마조히스트가 아니었다. 니체는 고통을 좋은 삶의 구성 요소로, 배움의 수단으로 여겼다. "오로지 고통만이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P. 385
니체는 말했다 고통은 청 하지 않았지만 반드시 답 해야 하는 부름이다
철학은 스파보다는 헬스장에 더 가깝다.
˝걷기는 자극과 휴식, 노력과 게으름 사이의정확한 균형을 제공한다.˝
399쪽
심리학자들은 지혜의 정의에 대해 수십 년간 합의를 이루지 못햇다. 이 베를린 지혜 프로젝트는 지혜를 규정하는 다섯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사실적 지식, 절차적 지식, 인생 전체에 걸친 맥락주의, 가치 상대주의, 불확실성을 관리하는 능력이 그것이다. 그중 마지막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삶의 불확실성과 혼란을 관리해주겠다고 약속하는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의 시대를 살아간다. 하지만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삶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예측 불가능하고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스토아 철학은 이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 스토아철학의 핵심 교리는 격동의 시기에 더욱 매력을 뽐낸다. 나는 마르쿠스의 책을 읽었기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철학이 얼마나 많은 것을 요구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즐거운지는 알지 못했다.
어려운 시기의 철학인 스토아 철학은 재앙 속에서 태어났다. 기원전 300년경 제논이라는 이름의 페니키아 출신 상인이 배를 타고 아테네의 피라에우스 항구로 향하다 난파되었고, 자색 염료를 실은 귀중한 화물을 전부 잃었다. 목숨을 건진 제논은 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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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난로의 불이 뜨거운 재로 변하고 커피는 점점 더 차가워지지만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다. 우리는 스토아철학에 무릎을 담갔고, 더 깊이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 에픽테토스의 안내서 속 날카로운 문단들을 하나하나 읽어나간다. 어떤 문단은 긴 토론을 벌일 만하고, 어떤 문단은가병누 끄덕임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다 이 문장이 나타난다.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그들의 판단이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가만히 자린에 앉아 심오하면서 동시에 너무나도 명백한 20000년 전의 생각을 받아들인다.
스토아학파는 우리의 감정이 이성적 사고의 산물이라고 믿지만 그 사고에는 결함이 있다고 보낟. 사고방식을 바꿈으로써 자신의 느낌도 바꿀 수 있다. 스토아철학의 목표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이라 아니라 정확하게 느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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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를 둘러보다 보면 눈에 보이는 사람 중 내가 가장 나이가 많다는 사실을 깨닫느다. 요즘 이러 일이 자주 일어난다. 이렇게 갑자기 쥐위에 젊은이들이 많아지다니 당혹스럽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거다. 나는 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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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은 고정되어 있는 거대한 물체이며,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다. 노년과의 만남은 절대로 부드럽게 이뤄질 수 없다. 우리는 노년을 스쳐 지나가지 않는다. 옆구리를 살짝 부딪치지 않는다. 우리는 노년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어느 날 아침 시몬 드 보부아르는 매일 아침 그렇게 하듯 거울을 들여다보고 웬 낯선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사람은 누구지? 거울 속 여자는 "눈썹은 눈 위로 흘러내렸고 눈 밑에 다크서클이 깔렸으며, 내가 여전히 나이면서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저 글을 쓸 무렵 보부아르는 쉬한 살이었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보부아르가 노년에 관한 자신의 저서에서 주장했듯이 나이는 보는 사람의 눈 속에 있다. 보부아르는 자기 앞에 있는 사람들의 눈이 눈앞의 모스블 좋아하지 않을까 봐 더 나쁘게는 아무것도 보지 못할까봐 걱정스러웠다.
-p.474
나는 이것이 노년의 최종 과제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물길을 좁히는 것이 아니라 넓히는 것. 꺼져가는 빛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이 다른 이들의 삶 속에서 계속 타오를 것임을 믿는 것. 카이로스의 지혜. 모든 것에는 알맞은 때가 있다. 심지어 물러나는 것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