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이 처음 발표된 것이 2001년이라는 것이다. 99년부터 2000년까지 신문에 연재한 것을 엮어서 낸 소설. 현재 발표되었다고 해도 손색없는 주제 의식을 지닌 작품을 20년도 전에 내놓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시대를 앞선 선견지명을 엿볼 수 있다.
1985년부터 작품을 발표했다는 이 작가는 한국에 꽤나 많은 작품이 번역되었다. 나의 독서 인생 가운데 일본 추리 사회파 소설들을 즐겨 읽던 시기가 있기는 했었는데 07~09년의 시기이다. 이때 레몬, 용의자 X의 헌신, 방황하는 칼날, 호숫가 살인 사건을 읽었다.
본격 미스터리에서 사회파 미스터리로 무게 중심을 옮겨온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작품에서 살인 사건을 소재로 삼아 인간의 성정체성과 30대 남녀의 사랑과 우정을 다루고 있다. 58년생인 작가가 마흔 초반에 30대에 관한 이야기를 쓴 것이므로 작가 동년배의 생각과 이야기를 다루었다고 말해도 무방하리라.
“니시와키 그 때도 즐거웠어. 왜 인간은 변하고 마는 걸까? 게다가 나쁜 쪽으로. 성공하면 오만해지고, 실패하면 비굴해지지. 나는 이런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니야. 부잣집 딸과 결혼해 가문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어.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런 길을 선택했어. 그런 자기혐오 때문에 사가 일행과 젠더 문제에 맞서는 데 열중했지. 하지만 그건 자기만족이었고 현실 도피에 불과했어. 그저 눈앞의 적을 쓰러뜨릴 생각만 했던 때가 그리워.”
그 밖의 밑줄
“정말 질리지도 않고 똑같은 얘기를 떠드네. 아무리 지나도 나는 그 필드골 얘기를 들을 거고, 너는 마지막 패스 얘기를 들을 거야. 우승을 놓친 것은 나도 분하지만, 벌써 13년 전 일이야. 보통은 잊지 않나?” 스가이가 말했다. 데쓰로는 잠자코 웃었다. 안자이와 마쓰자키가 진심으로 그 일에 집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충분히 안다. 그들은 무언가를 되찾고 싶어 과거 이야기를 되풀이할 뿐이다.
--- p.16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변하리라 생각했어.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어. 오히려 육체와 정신의 갭을 의식하게 되고 말았지. 나름 노력도 했어. 줄곧…… 계속 연기했어.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연기가 아닌 날이 오리라 생각하고. 하지만 소용없었어. 마음은 얼버무릴 수 없었지.”
--- p.45
“나는 말이야…….” 리사코도 목소리를 높인 후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다시 미쓰키를 봤다. “미쓰키의 인생을 어정쩡하게 끝내고 싶지 않아. 네 인생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야. 이대로 교도소에 들어가면 어떤 답도 낼 수 없어. 아니면 철창 안에서 나는 남자라고 주장하는 것만으로 만족해?”
“그럼 어쩌란 거지? 무책임한 소리 좀 그만해.” 데쓰로가 의자에서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리사코는 등을 꼿꼿이 펴고 미쓰키를 곁눈질하면서 몸만 데쓰로 쪽으로 살짝 틀었다.
“책임은 내가 질게. 그럼 되지?” 선언하듯 말했다.
“책임이라니…… 어떻게?”
“미쓰키를 경찰에 보내지 않을 거야. 누가 뭐라든.”
--- p.73
“여자의 몸을 지님으로써 미쓰키가 품은 초조함과 분노는 많든 적든 여성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어. 마음이 여자라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라고. 그저 익숙할 뿐이지. 그리고 포기하고 살 뿐이야.”
리사코는 하고 싶은 말은 끝났다고 마무리하고 소파로 돌아왔다. 테이블 위의 담배를 들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그녀가 토해낸 연기가 너울너울 공중을 맴돌았다. 전원의 마음을 표현하듯 공기는 하얗고 뿌옇다.
“리사코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잊었어. 내 모습을 보는 것은 타인만이 아니야. 이 세상에는 거울이라는 게 있어.” 미쓰키가 말했다.
“그 거울을 보는 눈도 왜곡되었다는 생각은 안 해?”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이제 어쩔 수 없어.”
--- pp.124~125
“분명하게 말하지. 나는 너희들 편이 될 수 없어.”
하야타의 말은 데쓰로의 온몸을 관통했다. 무슨 소리냐는 말을 하려 했으나 입술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물론 나는 아직 아무것도 쥔 게 없어.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 너희들은 뭔가 알고 있어. 알고 있고, 그것을 숨기려 해.”
(…)
“알고 있겠지만, 내 일은 숨겨진 것을 폭로하는 거야. 그것이 어떤 인간에게 상처가 될 것인지는 일단 생각하지 않아. 그러므로 나는 너희들이 숨기려 하는 것도 폭로할 수밖에 없어.”
데쓰로는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만드는 무언가가 하야타의 말에 있었다.
“하지만 말이야.” 하야타가 말을 이었다. “나는 너를 표적으로 삼지는 않을 거야. 너와 네 주위에서 정보를 얻으려 하지 않겠어. 완전히 다른 경로를 통해 사건을 쫓을 거야. 그 결과 어디에 도착할지는 모르겠어. 무엇을 잃을지도 생각하지 않을래. 그다음은 그때 가서 생각할 거야. 이게 내 방식이니까. 공정하게 싸우자고.”
--- pp.188~189
“됐어. 알아. 다 내 만족이고 혼자 난리인 거지. 영원한 짝사랑이라는 거야. 하지만 그래도 내게는 소중해.”
영원한 짝사랑, 이라……. 데쓰로도 그 마음이 왠지 이해됐다.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집착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 누구나 그런 것을 지니고 있다. 미쓰키의 마음이 남자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p.213
“남자와 여자는 뫼비우스 띠의 앞뒤와 같아요.”
“무슨 뜻이죠?”
“일반적인 종이의 경우 뒤는 언제나 뒤죠. 앞은 영원히 앞이고요. 양쪽이 만날 일도 없어요. 하지만 뫼비우스 띠는 앞이라고 생각하고 나아가면 어느새 뒤가 나와요. 즉, 양쪽은 연결되어 있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이 뫼비우스 띠 위에 있어요. 완전한 남자도, 완전한 여자도 없어요. 또 각자가 지닌 뫼비우스 띠도 하나가 아니에요. 어떤 부분은 남성적이지만, 다른 부분은 여성적인 것이 평범한 인간이에요. 당신 역시 여성적인 부분이 얼마든지 있어요. 트랜스젠더라 해도 똑같지는 않아요. 트랜스섹슈얼도 다양하고요.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없어요. 그 사진 속 인물도 육체는 여자인데 마음은 남자라는 단순한 표현으로 다 담을 수 없어요. 내가 그러하듯.”
--- p.421
번역자 인터뷰
히가시노 게이고는 다양한 주제로 여러 작품을 써온 작가입니다. 다른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의 번역도 다수 해오셨는데, 이 책 『외사랑』이 다른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과 비교해 특별한 점이 무엇일까요?
히가시노 게이고는 본격 미스터리부터 사회파 미스터리까지 모든 장르에서 활동하고 있죠. 또 작품의 주제도 아주 다양합니다. 대체로 본격에서 사회파로 천천히 무게 중심을 옮겨왔다고 생각하는데요, 『외사랑』 역시 굳이 분류하자면 사회파 미스터리로 자리매김할 수 있겠죠.
하지만 다른 사회파 미스터리가 사회적 주제를 품고 있으나, 살인이라는 미스터리 요소를 중심으로 가져가면서 사회적 메시지를 슬며시 넣은 데 반해, 『외사랑』은 오히려 살인 사건을 소재로 삼아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주제를 더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고, 그 속에서 우정과 사랑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사회파 미스터리이면서 휴먼 드라마의 요소가 아주 짙은 작품입니다.
『외사랑』을 번역하실 때,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번역하셨나요?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작품 속에 나오는 젠더 문제와 관련된 용어와 개념을 어떻게 정리할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이 작품이 오랜만에 만난 동창생들의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청춘을 구가할 때 서로에 대해 샅샅이 안다고 생각했던 인물들이 사회에 나가 저마다의 세월을 보내고 다른 직업과 처지에 놓이게 된 상태에서 사건에 얽히면서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협력하며 각자의 세계관을 드러냅니다.
우리도 살면서 이런 일을 종종 겪기 마련이죠.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한 친구가 나와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드러내는 순간들이요. 그럴 때 낙담하면서도 과거에 맺은 강한 연대감에 그에게서 쉽게 등을 돌리지 못하도록 할 때가 있습니다. 작품 속 주인공들도 마찬가지예요. 서로 다른 처지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듯하나 역시 과거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지도 못합니다. 그런 애틋하면서도 씁쓸한, 그러면서도 푸근한 감정을 문체 속에서 살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번 『외사랑』을 번역하시면서 어려웠던 점이 있었다면 무엇일까요?
앞의 질문과 이어질 것 같네요. 『외사랑』은 젠더 문제를 20년도 전에 다룬 작품입니다. 오늘날 젠더 문제는 엄청나게 활발한 논의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어, 늘 새로운 개념과 용어가 생기고 복잡한 분화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 다양한 개념을 제가 다 알 수 없다는 게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작품 속에서 쓰이는 젠더 용어들이 지금도 동일하게 쓰이고 있는지 하나하나 확인해야 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혹시, 그 용어들에 또 다른 편견을 담는 게 아닌지도 고민했죠. 교정을 거치면서 담당 편집자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습니다. 이 단어는 올바르지 않다, 다른 단어로 사용하자. 조언과 제안을 나누며 하나씩 정해나갔습니다. 혹시 잘못된 용어 사용이 있다면 너그럽게 봐주시고 또 적극적으로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외사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나 구절은 무엇인가요?
691페이지의 '어이! 뭐 하는 거야!'라는 구절입니다. '에이, 그게 뭐야!'라고 생각하시는 독자분이 많을 겁니다. 그러나 제게는 가장 결정적인 장면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이 장면은 거의 마지막 부분에 경찰에 들킬 위기에 놓인 주인공들에게 기자인 하야타가 건네는 말입니다. 주인공들이 범죄를 저지른 동창을 어떻게든 구하려고 하는 데 반해 하야타라는 인물은 작품 초반부터 자신의 직업관을 지키겠다며 반대 입장에 섭니다. 주인공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죠. 그런 그가 마지막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우정'을 선택하는 장면입니다. 이제는 놓아야 하는 과거이지만 결코 놓을 수 없는 애절한 마음, 정체성이나 사회적 처지보다 앞서는 인간으로서의 마음, 함께 했던 우정에 끝내 손을 내미는 장면이라 좋아합니다.
번역가님께서 생각하시는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는 어떤 작가인가요?
새삼 히가시노 게이고에 대해 구구절절 얘기하는 일은 독자 여러분께 성가신 일일지 모릅니다. 그만큼 히가시노 게이고는 대작가가 되었죠. 그러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자면, 번역가 입문 초기 히가시노 게이고는 제게 과학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가장 현대적인 주제를 본격 미스터리로 완성할 수 있음을 알려준 작가입니다. 이후로도 꽉 짜인 미스터리 구조 속에 정말 다양하고 묵직한 주제를 아주 자연스럽게 녹여낸다는 점, 여기에 휴먼 드라마로서의 감동까지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장르 문학 작가의 모델이 아닐까 싶습니다.
『외사랑』을 읽을 독자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외사랑'이라는 제목 때문에 혹여 달달한 사랑 이야기가 담긴 학원 미스터리로 오해하실까 걱정했습니다. 어렵게 여겨지기 쉬운 젠더 문제를 절절하게 풀어낸 작가의 깊은 계산이 『외사랑』이라는 제목에 담겨 있으니, 히가시노 게이고가 왜 하필 제목을 『외사랑』이라고 지었는지 한번 생각해 보며 읽어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