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계획대로 뚜벅뚜벅 가고 있으면서도 가끔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며 의도적으로 내 여정을 오역했다. 지쳐서, 다 놓고 쉬고 싶어서. (47쪽)
"난 왜 이렇게 못생겼어?"
엄마는 단호하게 답한다.
"넌 못 생기지 않았어."
어기는 엄마의 말을 믿지 않는다.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니까 당연히 그런 대답을 하리라.
"엄마는 내 엄마니까 그러는 거잖아."
엄마는 의아한 얼굴로 되묻는다.
"내 생각은 엄마라서 안 중요해?"
"안 중요해!"
(중략)
"엄마의 생각이니까 제일 중요한 거야. 내가 널 제일 잘 아니까."
하긴 그렇다. 엄마의 생각이니까 안 중요한 게 아니라 오히려 엄마의 생각이니까 제일 중요하다. 세상에서 나를 제일 잘 알고 제일 아끼는 사람이 하는 말이니까. 어마만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의 말을 더 귀담아 들어야 하는 게 논리적으로 옳다. (88-89쪽)
"I‘m not defined by you."
(나는 당신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중략)
가령 어떤 사람이 나를 고구마라고 부른다 해서 내가 고구마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나를 형편없는 번역가, 못난 부모라고 한다 해서 내가 형편없는 번역가나 못난 부모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말엔 날 정의할 권위나 권리가 전혀 없다. (90-91쪽)
어떤 논리가 있든 어떤 사정이 있든 내 마음에 안 들면 틀렸다고 주장하는 태도. 이런 상황이 연출되면 대개는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 목소리 큰 사람과 싸우는 건 피곤한 일이거든. (157쪽)
자식들은, 특히나 궁하게 자란 자식들은 그저 부모의 인생이 불행했을 거라고 넘겨짚는다. 하지만 부모의 인생은 부모의 인생대로 희로애락이 있었을 거다. 어떻게 나는 그 시절을 한번 물어볼 생각도 않고 당신의 불행을 멋대로 단정했을까. 자고로 번역가라면 원문을 제대로 확인하려는 노력은 기울었어야 했다. (167-168쪽)
반복된 농담이 사회적 인식을 형성하는 과정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하다. (174쪽)
어른의 시선으로 아이의 행동을 번역하다 보면 이런 오역을 저지르기 쉽다. 마치 영어 번역을 해야 하는데 일어 사전을 들고 번역하는 것과 같다. 아이의 말과 행동을 번역할 땐 어른 사전을 잠시 치우고 아이 사전을 펼쳐야 한다. (215쪽)
가난은 개인의 책임이 아닌 경우가 훨씬 많다. 이런 말은 그들이 그저 미련했기에, 노력하지 않았기에 가난하게 죽는다고 말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미련하지도 않을뿐더러 몸을 갈아가며 노력한 사람들이 가난하게 죽는 것을 나는 너무나도 많이 봤다. (중략) 가난은 쉽게 죄악시할 대상도, 자랑할 대상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실존적이고 실제적인 비극이다. (223쪽)
성공은 ‘오로지 운‘도 아니고 ‘오로지 노력‘도 아니다. 개화할 정도로 충분히 쌓아 온 노력이 좋은 때를 만나 결실로 구체화하는 게 성공이 아닐까. 그러니 남들이 운이 먼저라고 하든, 노력이 먼저라고 하든, 또 다른 뭔가가 먼저라고 하든 일단은 멈춰서 고민하기보다 뚜벅뚜벅 제 길을 갔으면 좋겠다. (중략) 누가 뭐라건 자기 의지로 걸아야 한다. 외부에서 유발한 동기는 가치도 효용도 없다. 내부에서 유발한 동기만이 나를 투과하지 않고 남는다. (233쪽)
애초에 좋은 위로의 말이라는 게 존재하는지도 의문이다. 격과 식을 갖춘 말이야 있겠지만 온전히 마음을 달래 줄 수 있는 마법 같은 위로의 말 따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난 이번에도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하고 종일 먹먹하다. (중략) 개인적인 행복과 타인의 불행을 동시에 마주하는 순간에도, 때로는 죄책감으로 때로는 감사함으로 삶을 이어간다. 삶은 이토록 모순적이고 불가해하다. 감히 번역해 낼 수 없을 만큼. (272쪽)
나의 온기를 나누거나 타인의 온기를 인식하는 것은 감각의 영역 같기도 하다. 나의 나의 온기를 나누거나 타인의 온기를 인식하는 것은 감각의 영역 같기도 하다. 나의 온기가 필요한 순간을 포착하는 것도, 외부의 손길이 계산 없는 온기라는 것을 판단하는 것도 감각이다. (2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