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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보면,

보름스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그 삶은 살 만하지 않은 것으로, 이런 삶은 주체의 삶이 아니기에, 삶이 살 만한 것이 되려면 주체가 있어야 하고 그 주체의 삶이 객관적인 관점에서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고 본다.   

버틀러는 삶이 살 만한지 살 만하지 않은지는 주체가 느끼는 주관적 경험에 따라 판단하며, 사람들이 각각 자신의 경험을 주관적으로 어떻게 의식하고 그 경험에서 어떤 의미를 끌어내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즉 주관적 경험을 통해 삶의 가치를 판단하거나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정리하면, 보름스는 생명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명확한 생명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그 삶은 살 만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지만, 버틀러는 그러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가고 있으며 그런 그들의 삶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143쪽)"

보름스는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에 대하여 주체가 있고 없음 또는 삶과 죽음이라는 양극성으로, 버틀러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겹치는 양가성으로 주장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양극성과 양가성의 삶을 살고 있다고 본다.

나는 버틀러의 입장에 동의한다. '좋지 않다'가 '싫다'의 의미가 아니고, '좋다'의 반대가 '싫다'는 아니니까. 

그렇다면 살 만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살 만한 삶의 조건이 확보되어야 한다. 즉 몸이 놓인 사회적 상황에서 '돌봄'의 중요성이다. 이러한 살 만한 삶의 조건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민주주의 정치가 필요하다.

아무튼, 두 사람은 우리가 살 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 '돌봄'을 강조한다.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고 묶여있기에 또한 다른 사람이 없다면 나의 삶이 없기에, 서로의 삶에 대한 의무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 문화는 살 만하지 않은 삶에 놓여 있는 삶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고 싶어 한다..  


눈이 많이 왔다. 오랫만에 눈길도 걸어봤다. 설날에는 아들 집에 간다고 갈비도 재고 불고기도 만들고, 대기업 도움으로 떡국, 사골 육수, 부침개도 몇 가지 만들었다. 94세가 된 친정 아빠는 왜 못 오고 안 오냐고, 어쩌면 이 후 못 볼 수도 있는 데, 여기의 선택은 잘 한 걸까? 그래서 삶에서 '양가성'이 조금 더 좋다. 


'살 만한 삶'으로의 실천이 남아 있다. 잘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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