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에 다닐 때, 어떤 동기 하나가 있었다.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는 친구였다. 동아리 선후배와 잘 어울리며, 대학교 생활을 즐겼던 그 친구. 축제 때는 여러 준비를 하며, 분주히 보내는 그 친구. 대학교에 있을 때는 수시로 그곳에서 지내기도 한 그 친구. 그에 반해 힘 절약주의자에, 낭만적 아웃사이더였던 나는 조용히 대학교 생활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동아리 활동을 해 보는 것도 괜찮았을 것 같다. 필수 과목은 아니지만 선택 과목 같은 느낌. 그 친구는 그 선택 과목을 즐기면서 수강한 것이었다. 평가가 없는 과목을. 즉, 그 친구에게는 대학교 생활에서 동아리 활동이 취미였다. 그 친구에게 지금 취미가 있을까. 있다면 뭐가 취미일까.
책, 《무채색 아저씨, 행복의 도구를 찾다》는 마흔셋의 나이에 그림을 취미로 갖게 된 사람의 이야기다. 그 나이에, 그림이라는 취미라니. 이런 생각을 하면서, 불현듯 대학교 다니던 그 시절의 그 친구를 떠올리게 된 것이다. 이 아저씨에게 그 친구를 투영하면서. 과연 그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삶은 팍팍해지고, 인생은 의미를 잃어가고, 일에 대한 열정은 슬슬 사라져가니 다른 세계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금방 1년, 그림을 그리며 생각한 것> 중에서. (220쪽).
그는 <서울신문>의 이경주 기자다. 2018년 9월. '내가 고민하는 모습을 본 아내는 우물쭈물하다 또 아무것도 못한다며 아이처럼 내 손을 끌고 화실에 갔다.'(6쪽)라고 하며, 그 시작을 적었다. 지친 직장인이었던 그. 전에 한 선배가 술자리에서 '오래 사는 세상이다. 뭔가 할 게 필요해. 죽을 때까지 일할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재미를 느낄 취미가 필요하다. 취미를 노후에 찾겠다고 나서면 이미 늦어. 젊을 때 하나 마련해라.'(17~18쪽)는 조언도 있었다. 게다가 2018년에 주 52시간제가 도입되었는데, 기자는 주로 금요일, 토요일에 쉰다고 했다. 아이가 학교에 가는 금요일 오전이 그에게 자유 시간이 된 것이다. 아이가 그린 그림을 보고 미술을 배워볼 것을 고민하던 그. 그렇게 아이가 다니는 미술학원에 등록했다. 그리고 칭찬의 고수인 선생님을 만나게 됐다.
'취미는 산책처럼 마음 가는 대로 즐기는 것이 가장 좋다. 내게도 그림은 하고 싶은 때 하고 싶은 만큼만 하면 되는 '일상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게으름이 허용되고, 그리다 중도에 포기해도 상관없다. '하면 된다'의 영역이 아니라, '되면 한다'의 영역인 것이다. 남의 평가로부터 벗어나고, 오롯이 내 마음에서 떠오르는 무언가에 집중하는 것만으로 편안해진다.' -<원데이가 아닌 꾸준한 취미를 갖고 싶다면> 중에서. (181쪽).
그는 '그림은 일기'(213쪽)라고 한다. '그림마다 당시의 생각과 삶에 대한 태도, 그날의 기분, 결심 같은 것들이 갖가지 형상으로 새겨져 있다'(213쪽)고 했다. 그는 또 말한다. '그림은 감정을 쏟아 붓는 용광로의 역할을 했다. 분노에, 우울함에, 두려움에, 기쁨에, 아름다움에 대한 탄성으로 한참을 그리고 나면 평온함이 찾아왔다'(222쪽)고 한다. '취미는 산책처럼 마음 가는 대로 즐기는 것이 가장 좋다'는 그. 그림을 정말 즐겼다.
영화, <플레전트빌>(1998) 포스터.
<플레전트빌>(1998)이라는 영화가 있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TV 시트콤 '플레전트빌'. 흑백이다. 어느 날, 쌍둥이 남매가 이 TV의 세상으로 들어가게 된다. 흑백의 이 세상은 개인의 감정이 숨겨진 곳이었다. 그런데, 이 남매로 인해 개인의 감정을 찾게 되는 사람들. 그렇게 하나하나 컬러를 갖게 된다. 무채색 아저씨였던 이경주 기자. 일에 지친 직장인이었던 그는 감정을 담을 도구가 없었다. 마치 <플레전트빌>의 흑백 세상과 같았다. 그랬던 그가 감정을 담을 행복의 도구를 찾은 것이었다. 취미로 만난 그림이었다. 그렇게 유채색 아저씨가 되었다. 그것은 <플레전트빌>의 세상에서 컬러를 찾은 것에 비견되는 사건이었다. 인생의 소중한 변화였다. 탁월한 선택 과목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잠시 생각해 봤다. 대학교 동기인 그 친구. 동아리 활동에 열심이던 그 친구. 그도 아마 지금도 취미가 있을 것 같다. 산책처럼 마음 가는 대로 즐기고, 오롯이 집중하는 것만으로 편안해지는 그런 취미. 그 행복의 도구로 유채색 아저씨가 되었을 것 같다. 이경주 기자와 그가 다시 겹쳐진다.
책, 《무채색 아저씨, 행복의 도구를 찾다》는 그림이라는 취미 생활 1년의 기록이다. 그림만이 아니다. 그의 삶, 생각도 담겨 있다. 기자답게 글이 간결하고, 명확한 일기. 그가 그림을 그리며 느끼는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이 하나하나 다가온다.
덧붙이는 말.
하나. 이경주 기자는 2020년 7월부터 3년 임기로 미국 워싱턴 특파원을 지내고 있으며, 여전히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출판사로부터 받은 책으로 읽고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