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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예이나
 

바오밥나무 씨앗이 발아하는 것처럼 눈꺼풀을 틔우게 만드는 글자들로 그는 여러 가지 작당질을 시작합니다. 작당질, 이라고 불러야 좋겠습니다. 그는 독자와 소통할 여지는 남겨두지만, 그의 글자들은 일종의 실시간 실험 영화의 속성을 띄고 있습니다. 그는 두 가지로 평이 양분되는 폭이 꽤 넓은 작가이기도 한데 그것은 그가 쏟아내는 애매함과 모호의 경계가 선명한 선이 없고 불분명하기 때문이겠지요. (취향의 문제이기도 합니다만)

박민규는 휴머니스트입니다. 정작 본인은 담담한 말투로 들릴 듯 말 듯 조용히 말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박민규는 휴머니스트라고.

그가 조근조근 말하는 많은 이야기는 소외된, 작은,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그런 것들에게 초점이 맞아 있습니다. 남루하고 너저분하고, 때론 적나라하기까지 한 것들이지요. 고학생, 우주여행의 소망, 주머니가 빈 몽상가, 손님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모시는 지하철의 푸쉬맨, 너구리 게임. 이것들이 훌리건 냉장고 안에서 조물조물 섞이다가 마침내 카스테라 한 접시가 되고 마는 것이지요. 이 부드럽고 텁텁한 것을 한 입 베어물면 독자는 깊은 안정감에 빠지게 됩니다. 식도를 넘어 위에 도달해 웅크리고 있는 카스테라. 전신으로 따스함이 퍼져나가는 소화 경험은 흔치 않은 것입니다. 많은 작가들이 글을 쓰지만 세상에 온기를 더하는 소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인간적 허무와 염세의 시각에서 우리는 스스로 이것이 객관적인 것이라고 씁쓸한 마른침을 삼키며 자위하게 됩니다. 생각하자면 할수록 이토록 슬픈 세상입니다. 쉽게 감수하는 이는 가슴이 금방 물 먹은 솜처럼 먹먹해질 테지요.

어쩌면 다루는 소재는 꽤 비슷할지도 모릅니다. 단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일 - 예를 들어 지구의 순환이라 한다면, 그는 간단히 지구를 개복치라 대유함으로서 독자가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개복치의 자전을 떠올리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과학책에서나 보는 푸르고 허연 행성의 이질적인 자전이 아니라, 바람이 잔뜩 들어간 퍼덕이는 개복치가 몸을 뒤집고 있는 것입니다. 희극적이고, 싱싱하고, 즐겁지요. 그는 이런 식으로 독자에게 태평양과 대서양의 해조류가 맞바뀌지 않는 날들이 연속되더라도 기운을 낼 수 있는 한 가지의 방법을 일러 줍니다. 번뜩이는 표현과 작가의 저변에 깔린 다정한 인간애의 합작입니다.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다음 세기에는 이 세계를 찾아온 모든 인간들을 따뜻하게 대해줘야지. 추웠을 테니까. 많이 추웠을 테니까 말이다.” 박민규의 힘은 이런 것에서 오지요.


어떤 이들은 톨스토이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더 위대한 작가라고 합니다. 예컨대, 톨스토이 작품들의 캐릭터들은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나면 작가 자신의 연민으로 어떻게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들이 되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캐릭터들은 철저히 작가에게서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는 작가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박민규는, 엄밀히 말하면 전자입니다. 모호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그의 캐릭터들은 작가와 동떨어져 있지 않지요. 상관없습니다. 작가 자신도 우주 건너 어느 먼 행성에 위치해 있으니까요. 자기가 창조한 캐릭터들로 구성된 이웃들을 이해하는 일은, 더욱이 외계에서, 꽤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수 있는 일이지요. 상냥함은 노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요.

독자는 무의식중에 깨닫습니다. 금기였던 자신의 이야기를 이 사람은 괜찮아, 를 연발하며 쓰고 있다는 것, 스테이지 23을 넘는 인간과 넘을 수 없는 인간 둘 다 모두 다 괜찮은 인간일 거라는 것, 그리고…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것, 살아야겠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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