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문의 길』에서 우리 학문의 길을 여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우리 학문을 살리고, 교육도 학문의 목적에 맞게 살리자고 하는 것이다. 우리 학문을 살리기 위해서는 대화를 통한 발상의 전환이 필수적인데 그 역할은 철학, 문학, 역사를 아우르는 인문과학이 담당할 수 있다. 우리 학문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외래사조로 인한 발상과 표현의 사대주의이다. 원인은 식민지 시대와 분단의 시대를 거치면서 전통학문이 현재와 단절된데 있다. 그 공백을 서양과 일본에서 들어온 학문이 자리를 메웠다. 그러나 외래 사상의 토착화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생각이 다를 것이다. ‘현재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 것 아닌가.’, ‘왜 우리 것이어야 하는가.’, ‘이것이 국수주의적인 발상은 아닌가.’라고 하는 문제를 제기 할 수도 있다. 여기서는 두 가지 근거로 요약하여 우리 학문을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먼저, 현재 우리 학문은 서양의 학문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서양 학문론이 문제가 되는 것은
첫째로 학문의 유입경로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중국문화가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전해졌듯이, 초기에는 서양문화가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로 흘러들어왔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일본식 사고로 바뀌어 들어온 것만이 문제는 아니다. 일본이라는 나라에는 서양에 대응되는 철학이라는 학문이 없기 때문이다. 개별적이고 실증적 학문이 발달한 일본에서는 철학에 해당하는 이론적 토대가 마련될 길이 없었고 대신 문학이 철학의 구실을 했다. 일본의 학문이 뒤떨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런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고 비교해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우리 학문은 일본이 공리공론이라는 트집을 잡아 경시할 정도로 총괄적이고 이론적인 학문이 발달하였다.
둘째로 서양학문이 직접 수입이 되었더라도 현재 당면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해결해 줄 수 없다. 그 이유는 사상사적인 위치에서 살펴볼 수 있다. 중세의 암흑기를 거친 서양철학은 그 과정에서 이성과 경험이라는 이분법을 만들어내어 감성이 빠진 이성을 강조하는 학문론으로 발전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사상적 고뇌를 거친 적이 없기 때문에 굳이 길을 돌아갈 필요가 없다. 서양의 사고 법칙을 발전시킨 테카르트, 칸트, 헤겔의 철학은 점차 이전 이론의 문제점을 해결하면서 발전하였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결함과 제1세계의 우월성만을 합리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서양의 학문론은 각 학문의 대등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과학을 윗전에 모셔놓고 인문학은 경시하는 불균등한 형태로 왜곡된다. 이것이 현대 사회에 문제점으로 나타났고 그 대안으로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우리 전통 학문이다. 우리 선인들의 철학은 바로 그 자체가 학문학이고 전체가 세부를 포괄하고 세부는 전체를 뒷받침하는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즉 이론과 실제가 따로가 아니다. 실천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문의 생산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학문이 필요하다. 우리 학문을 잊었기 때문에 학문이 제조업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사실정리에 그쳐 제대로 된 이론을 이끌어내지 못하거나(국내 소재), 외국학설을 소개하는데 치중하여 남을 뒤쫓는 데만 급급한 현 학계(외국 소재)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그러면 외산인 유․불․도교를 우리 학문이라고 떳떳이 말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아있다. 글쓴이는 동양의 철학도 각 나라별로 분류하여 검토할 것이 아니라, 서양 철학사처럼 동양철학사로 통합시켜 생각해 보자고 한다. 이렇게 뭉퉁그려 볼 경우 철학의 맥은 우리나라로 이어져 무르익었다. 인도를 거쳐 들어온 불교도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오면서 원효와 같은 독자적 불교를 만들어 냈고,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조선후기는 유교의 원조인 중국을 사상 면에서 훨씬 앞섰다. 제3세계의 학문의 화두인 민족성, 주체성의 문제는 조선후기 철학이 고민하던 근대의 문제와 연결이 되기 때문에 해결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글쓴이의 주장은 한마디로 전통사상의 발상을 통해 학문을 재창조하자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민족학문의 길이요, 세계학문의 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창조의 학문으로 발전 가능성을 지닌 우리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개념을 명확히 하고 다양한 유형의 글쓰기 개발이 필요하다. 곧 이론 지침을 세우고 수단인 표현방법 가꾸어야 한다.
책제목에서 많은 기대를 했었는데 읽어나가면서 실망도 많았던 책이다. 글쓴이가 하고자 하는 얘기가 ‘우리 학문의 길’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 문학이 가야할 길’을 제시하여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보고하고자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글이 어수선했다. 급하게 쓴 글인지 논리적 비약이나 억지 논리를 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는 막연함과 ‘우리 것만’이라는 자격지심에서 나온 발상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인문학적 근거를 가지고 문제점을 다루고 있어 감정적 대응으로 흐르기 쉬운 문제에 대해서는 잘 다루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고 생각하게 된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우리 사상을 학문론으로 접근했다는 점이 놀라웠다. 서양학문의 영향과 주입식 교육의 탓인 듯 한 데, 학문의 근본이 철학이고 이것이 역사발전을 통해 나온 산물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우리철학을 윤리이상으로 대해본 적은 없다. 전통사상으로 학문한다는 것이 아직은 생소하다. 학문방법론으로 접근 한 것이 아니라, 색다른 아이디어 제공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 이해가 잘 안간다. 이 점은 더 많은 공부를 통해 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둘째, 현재 학문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용어개념이 명확하지 못하고 정리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표현수단인 언어가 뒷받침되지 못하여, 단어가 부족하거나 뜻이 혼동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한자어를 받아들여 어휘수를 늘리자고 하는데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안는다. 내 입장은 중립적이다. 순수한글을 쓰자니 익숙하지 않아 못쓰고, 한자어를 쓰자니 어려워서 못쓰는 곤란함이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순수한글을 한글연구기관에서 보급하고, 한글로 표현하기 어렵거나 설명이 늘어지게 되는 경우에 한자어를 쓰는 것이 좋을 듯하다.
마지막으로, 화학자 르 샤를리에는 평형이동의 법칙에서 ‘모든 물질은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방향으로 평형 이동한다.’고 했다. 서구에서는 학문의 구심점을 잃자 동양사상에서 길을 찾았고 이미 몇 십 년 전부터 연구가 시작되어 엘리트들의 학문이 되었다. 서구 사상을 먼저 시작한 이들이 서구 사상의 한계를 깨닫고 방향을 바꾸어 우습게 보던 것을 오히려 높이 평가 하고 있는 실정이다. 7,80년대 유학생들이 서구학문을 배우러 갔다가 오히려 동양학으로 돌아서는 경우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이제야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게 된 우리 입장에서는 오히려 우리학문을 역수입해 오는 날을 맞게 되지나 않을가 하는 걱정이 든다.
인간의 역사는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이 깨져가면서 발전했다. 새로운 진리가 나올 때마다 편협한 감정적 대응으로 흐르거나 주댓없이 일방적 찬성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출판된 지 10년 가까이 되는 책이라 글쓴이의 주장이 이미 식상해 버린 면도 없잖아 있지만 ‘왜’라는 질문에 충실했고 생각의 조각들을 연결시켜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