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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림의 왕국
   이 책은 ‘현재’, ‘이 땅에서’ 동양학을 하기 위해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출발한다. 우리가 우리말을 우리글로 표현한 역사는 그리 길지가 않다. 중국에서 들어온 문화를 우리글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한문표기 하여, 순수한 우리말이 점차 사라지고 오랜 기간 소수의 특권층만이 정보를 누려왔다. 이런 상황에서 개화기를 맞이하여 한문 문화권에서 한글 문화권으로 이행하게 된다. 그러나 중국․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이 기간에 각국에서 들어오는 여러 문화를 자기말로 바꿔주는 작업이 부재하여 학문적 토대를 마련하지 못했다. 더불어 수 백 년을 이뤄온 문화는 명맥만 유지한 채 한글화 되지 못하고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수단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한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여타의 학문도 마찬가지이지만, 동양학을 하기 위해서는 한글화작업 곧 한문번역사업이 필수적이다. 그 동안의 학문수단이었던 한문은 언어체계와 문화체계가 우리말과 달라 우리문화가 녹아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동양학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문헌의 해석이 바탕에 깔려있어야 한다. 
  글쓴이가 주장하는 해석방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완전번역’을 말한다. 이는 한문에 토씨나 달아주는 불성실한 번역이 아니라, 주어와 술어의 문법구조를 정확히 파악하여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일상 언어로 바꾸어 주는 작업을 말한다. 또 다른 하나는 ‘영구번역’이다. 이는 ‘현재’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번역이란 늘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기 때문에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해석자에 의해서 끝임 없이 계속되어야 한다. 곧 고전을 쓴 이의 일상어로 생각하고 현대어로 바꾸는 것이다.

  말을 옮기는 과정에는 항상 문제가 따른다. 글쓴이는 서로 다른 언어의 인식구조 차이로 생기는 긍정적, 부정적 번역의 오류를 역사 속에서 찾아 올바른 번역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 예시, 중국에 『천주실의』를 번역해 천주교를 전파한 마테오 릿치는 『사서』의 번역을 통해 터득한 유교문화를 배경으로 천주교를 포교할 수 있었다. 문화적 배경의 차이로 해서 대응되는 말을 찾기 힘들었지만 중국인의 인식 도구를 통하여 서양문화를 소개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예시, 서양인의 동양관은 3단계로 구분한다. 1단계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 엿볼 수 있다. 일자무식의 상인, 마르코 폴로의 눈에는 종합적인 중국문화가 들어온 것이 아니라 물질적 측면만을 부각시켜 풍요로운 비단의 나라로 비춰져 있다. 2단계 제수이트 선교단은  중국을 플라톤의 철인정치가 실현되는 유교적 이상주의 나라로 인식하여 연구하였고, 정신적인 면을 높이 평가해서 중체서용의 신화를 만들어 냈다. 3단계는 헤겔의 정체사관이다.

  이러한 오류는 문화의 ‘상대적 인식’이라는 관점을 무시하고, 부분으로 전체를 파악했기 때문에 생긴다. 번역할 때도 마찬가지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문화를 받아들여 자기화 시키는 것이 관건이 된다.

  세 번째 예시, 중공에서 중국철학을 기술하는 관점이다. 중국공산당은 맑시즘이 변형된 마오이즘이다. 이 마오이즘은 소련과 다른 중국의 사회상과 언어의 개념차이를 이용해 만들어낸 새로운 공산주의이다. 마오이즘의 유물론은 중국정통의 유물론에서 끌어와 정치적 합리화에 이용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동양학을 하는데 필요한 선결작업인 번역은 방대하고 포괄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하고 이런 성과를 밑거름으로 해서 자기화 시켜나가야 한다. 특히 주의해야할 것은 동일어의 개념혼동과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오류이다. 번역작업은 모방이 아니라 새로운 발견을 위한 재창조 작업이다.


  얼마 전 주간지에 영미 고전 문학의 번역이 절반이상이 표절이고 엉터리 번역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새삼스러울 게 없다고 여기면서도 역시 씁쓸하다. 이것은 우리 고전의 번역뿐 아니라 우리학계 전반적인 현상임을 입증하는 기사였다. 도올의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 제기된 문제는 아직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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