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1905년 아인슈타인은 친구에게 편지에서 “자넨 요즘 뭣하고 있나? 이 냉동고래. 훈제되고 건조되어 깡통에 담긴 영혼아?”라고 적었다. 어쩌면 나 또한 냉동고래로 살아왔는지 모른다.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반복하고 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내 영혼을 위해 삶의 이정표가 될 책을 계속해서 읽었다.
김용규의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는 제목 그대로 철학카페에서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다. 생각해봐야 할 내용이 많았고 그만큼 밑줄을 긋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문학 작품에 나타난 사건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문제를 철학적인 풀어쓰고 있다. 다시 말하면 문학과 철학의 공통분모는 지금 우리에게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

이 책은 독서의 깊이가 풍부한데 그중에서도 나를 붙잡은 대목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였다. 카뮈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다. 시인 호메로스에 의하면 시지프는 인간 중에 가장 현명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그의 현명함 때문에 오히려 인간으로서 가장 견디기 힘든 가혹한 형벌을 받게 된다는 점이다. 오늘날 ‘시지프의 형벌’이라고 불리는 그 내용은 이렇다. 시지프가 높은 산 위로 거대한 바위를 밀어 올려놓으면 그 순간 바위가 굴러 내려가기 때문에 그는 계속해서 바위를 밀어야 하는 고통을 당해야만 한다.
이러한 시지프를 보면서 카뮈는 삶의 불합리한 모습을 놀랍도록 주제화한다. 그는 시지프의 무의미한 노동을 현대인의 권태로운 삶이라는 문제의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권태를 실존주의 시각으로 접근하면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을 살펴볼 수 있다. 하이데거는 권태를 ‘표면적 권태’와 ‘깊은 권태’로 나누었다. 표면적 권태는 어떤 상황에서 생겨나는 지루함이다. 반면에 깊은 권태는 무조건적으로 그냥 지루함이다. 그래서 전자를 비본래적 권태, 후자를 본래적 권태라 부른다.
하지만 이 둘의 중요한 차이점은 바로 ‘시간 죽이기’에 있다. 표면적 권태는 시간 죽이기가 가능하다. 어떤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튜브를 보는 것으로 시간을 죽인다. 반면에 깊은 권태는 시간 죽이기가 불가능하다. 결국 깊은 권테에서 벗어나는 일이 곧 본질에 앞서는 실존이 된다.
카뮈의 관점에서 시지프의 형벌은 시간 죽이기가 불가능한 깊은 권태이다. 따라서 권태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문제이다. 권태는 존재의 무의미성이기 때문에 삶이 부조리할 수밖에 없다. 권태와 부조리는 논리적으로 동일한 셈이다. 그러면 이러한 부조리 앞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 먼저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없다고 하면 자살이 최선의 방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실존은 무의미한 삶에서 의미를 찾는 일이다. 그러니 극단적인 방식의 자살은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일시적으로 위안이 될 것 같지만 끝내는 삶을 불행과 죽음으로 몰아간다.
이와 달리 희망은 어떨까? 희망은 적어도 자살과는 달리 삶을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다. 상식적으로 희망이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카뮈의 생각은 희망에서 벗어나 있다. 오히려 희망이 삶의 헛된 욕망이라고 비판한다. 희망이 현실을 회피하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희망은 구토가 나올 정도로 ‘야릇한 상태’다.
그러면 시지프의 노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자살도 아니고 희망도 아니라면 뭐라고 해야 하는지 난감했다. 자살에 반대하는 태도를 가진 나로서는 시지프가 고통을 이겨내는 힘이 곧희망이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희망은 인간이 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비결 같았다. 언젠가는 바위가 정상에서 굴러가지 않겠지, 라는 느낌을 끝내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와 달리 카뮈는 시지프를 ‘반항하는 인간’으로 제시하고 있다. 반항은 무의미한 노동을 하는 아무것도 아닌 자가 아니다. 또한 절망하거나 체념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자신의 운명을 알면서도 당당히 맞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반항하는 인간은 운명의 희생자가 아니라 운명을 우월하게 버티는 자이다. 그래서 카뮈는 반항하는 인간이 바위보다 강하다고 말했다. 인간은 자유와 존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카뮈의 실존주의 카페에서 그의 『페스트』를 읽어보면 페스트의 숨은 뜻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단순히 죽음의 병균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데, 바로 ‘부조리’라는 치명적인 이름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를 절망에 빠드리는 부조리한 운명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여러모로 생각하게 만든다.
이 책에서 저자는 카뮈의 부조리함을 ‘사막’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유인즉 카뮈가 반항을 ‘사막에서 벗어나기 않은 채 그 속에서 버티는 것’으로 풀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항하는 인간은 사막에서 버티는 인간이다. 지금에 와서 사막이라는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사막을 건너기’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사막을 건너는 방법은 ‘야콥의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다. 유레크 베커의 『거짓말쟁이 야콥』에서 야콥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절망적인 상황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1그램의 거짓말로 1톤의 희망을 만들어낸다. 비록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마 치 그런 것처럼’말이다.
조지 고든 바이런은 작가를 “별을 찾아 바람을 거슬러 항해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 책에는 카뮈의 『이방인』 이외에도 괴테, 셰익스피어, 한강 등과 함께 12개의 별이 저마다 반짝이고 있다. 어쩌면 삶이란 자신만의 별을 찾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