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고전을 읽었는지 모른다. 대략 고등학생 시절에 가깝다. 그때는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몰라 고전 한 권을 읽기가 쉽지 않았다.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으며 겨우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으나 왜 좋은 책인지 몰랐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살아온 시간만큼 경험이 쌓이면서 고전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고전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지금까지 살아남은 책이다. 고전의 생명력이 놀라울 정도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사실은 다른 데 있었다.
이다혜는 『오래된 세계의 농담』에서 고전을 “다시 읽는 책”이라고 말한다. 농담으로 들리겠지만 고전에서 ‘다시’라는 말이 중요한 이유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다시 읽어보고 싶고, 다시 생각해 보고 싶고, 다시 이야기하고 싶을 정도로 다시 필요한 책이다. 다시 말하면 책이 인생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고전의 분야가 여러 가지다. 소설만을 꾸준히 읽어 온 사람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다. 문학을 비롯하여 에세이, 자기계발, 음악, 영화에 이르기까지 고전을 발견하고 소개하고 있다. 그만큼 고전이라는 오래된 이야기와 많은 시간을 동고동락했다.
그래서 고전을 함께 읽으며 좋았던 점을 몇 가지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고전은 ‘아껴가며 읽는 책’이다. 작가는 세이쇼나곤의 『베겟머리 서재』에서 잉크 한 방울이 떨어지는 묘한 여운을 느낀다. 물론 오래된 책이라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어울리지 않는 부분도 있고 해석하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도 있다. 그럼에도 마음을 건드리는 순간들을 공감하게 된다. 가령, 마음이 불안불안하다는 모습을 ‘남자의 마음속. 한밤중에 안 자고 깨어 있는 스님’이라는 글에서 마음이 안 놓이는 장면이 잘 드러난다.
다음으로 고전은 ‘이사를 하며 남게 되는 책’이다. 이사를 할 때마다 버려야 물건들이 쏟아져 나온다. 책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집에다 책기둥을 무한정 쌓을 수는 없다. 내게 어떤 책이 중요한가를 따져보며 결국에는 진짜 좋은 책이 살아남는다.
작가는 시단(詩壇)의 모차르트라고 불리는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끝과 시작』를 무한정 사랑한다고 말한다. 국내 작가의 시집은 많았던 반면에 외국 작가의 시집은 거의 없다 보니 내게는 그의 시집이 아직 없다. 작가 덕분에 이제 와서 그의 존재를 알았다. 그럼에도 만약 내게 그의 시집이 있었다고 하면 아마도 무한정 살아남지 않았을까? 그의 「선택의 가능성」이라는 시에는 “시를 안 쓰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 시를 써서 웃음거리가 되는 편을 더 좋아한다”라는 말이 있다. 내가 갈망하면서 허우적거릴 때마다 ‘더 좋아한다’라는 말은 내게 무한한 위로다.
마지막으로 고전은 ‘천천히 읽는 책’이다. 나는 되도록 정독(精讀)하는 스타일이다. 다른 말로 정독은 천천히 읽는다는 이야기다. 이와 달리 속독(速讀)하게 되면 그만큼 책의 줄거리를 놓치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고전이 지루하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고전은 쓸데 없는 글자 낭비가 아니다. 작가가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읽을 때 대충 읽으면 곤란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뭔가 ‘모호하지만 강력한 경이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책장에는 고전을 완독한 책도 있고 읽는 도중에 멈춰버린 책이 여러 개 있다. 읽으면서 내용이 어느 정도 머릿속에 그려져야 하는데 도무지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안 읽히는 느낌을 버텨낼 마음이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작가가 말하는 고전을 읽을 수 있는 비법이 사뭇 흥미로웠다. 그중에서도 작가의 의도에 대한 궁금증이 있으면 질문을 만들어 보라는 방법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예를 들면, 등장인물이 많다고 하면 왜 인물이 많은지? 적어보라는 것이다. 각각의 질문을 연결하다 보면 어느 순간 글의 맥락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작가가 심혈을 기울인 작품을 독자들이 좋아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었다. 오히려 작품을 좀 더 탐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작가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고 책을 덮어버리면서 끝날 문제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