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계속해서 쓰는 존재
  • 선량한 차별주의자 (30만부 기념 거울 에디션)
  • 김지혜
  • 15,300원 (10%850)
  • 2024-12-06
  • : 43,645

우리는 먼저 인간이고,

그 다음에 국민이 되어야 한다.

-월든, 『시민불복종』

 

야간, 물류회사의 전등은 대낮보다 훨씬 밝다. 자동으로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에 물건들은 쉴새 없이 바코드 센서를 통과하면서 각 라인으로 흩어진다. 전등의 용도는 물건을 식별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곳에서 몸을 쥐어짜며 일하고 보니 전등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감시하기 위한 CCTV처럼 24시간 켜져 있다. 일의 속도가 느려지거나 멈추게 되면 그만큼 손해가 되는 생기는 현장이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그날 할당된 물건을 마감해야 하는 운명, 사람이 기계처럼 일할 수밖에 없는 열악한 시스템이다.


하지만 사람은 육체적으로 기계가 될 수 없다. 생수 때문에 물을 마실 수 있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문제는 마시는 물이 아니라 ‘배설하는 물’ 즉 오줌에 있다. 바삐 움직이며 일하는 중간에 화장실을 가기란 정말이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도저히 화장실에 갈 짬이 나지 않아 전전긍긍하며 참을 수밖에 지경에 이른다. 그래서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화장실을 갈 권리, 즉 오줌권은 ‘노동 3권’이 아니라 남의 눈치를 봐야 하는 ‘특권’에 가까웠다.


김지혜의 『선량한 차별주의자』에 나오는 특권에 대한 변론을 읽으면서 ‘차별감수성의 사각지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차별주의자와 거리가 멀었다고 생각했다. 차별주의자는 특권을 가졌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오줌권이 없이 일하는 내가 차별주의자가 될 리 없다. 오히려 차별을 당하는 자의 슬픔을 참고 견디며 살고 있다. 좀 더 고백하자면 일용직 노동자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일용직 노동자로 사는 불행의 책임을 따진다면 내 운명이 불행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일용직 노동자가 받는 부당한 대우마저도 당연히 감당해야 할 몫으로 여겼다.


그러나 특권에 부당한 영향력을 알면서부터 내 삶에 균열이 생겼다. 내 삶의 전화위복을 운명이 좌우하는 게 아니었다. 놀랍게도 차별이 ‘빅 브라더더'(Big brother)’이었다. 만약에 운명이었다고 하면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을 수 없다. 이와 달리 차별이라고 한다면 책임을 묻을 수 있다. 헌법 제 11조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받지 않아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사회 생활의 혹독한 현실은 정반대다. 저자가 지적하고 있듯 “누구나 정의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가 미치는 영역은 한계선이 있다.”(147쪽) 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결론적으로 어떤 국민만이 평등하게 된다. 상대적으로 어떤 국민에서 실격당한 국민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사회적 약자(弱者)’이다.


사회적 약자에게는 특권이 없다. 가령,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려고 하면 어떤가? 장애인에게는 대중교통이 아니라 지옥교통이 되고 만다. 그 순간 장애인은 대중교통이라는 특권을 강력하게 어필하게 된다. 장애인에게 특권은 그 자체로 생명이며 인간다운 생활을 한 권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은 사실상 이러한 권리를 박탈당하고 차별을 당한다. 우리가 장애인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인식한다면 모든 국민은 평등해질 것이다. 진정한 평등사회에서는 비장애인과 장애인이라는 구별 없이 모두가 대중교통을 손쉽게 이용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평등사회는 특권 없는 사회다.


여기서 우리는 좀 더 근본적인 회의를 생각할 수 있다. 도대체 장애인들, 즉 사회적 약자들의 행동이 왜 불법일까? 우리가 보기에 사회적 약자들은 불법적인 행동 때문에 ‘공공(公共)의 적’이 되었다. 공공의 적에 대한 명백한 인식은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만을 주장하고 공공의 질서를 외면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얼마든지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주장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지나치게 과도할 정도로 공공의 적에 대한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사회적 약자들을 단순히 공공의 적으로 혐오스럽게 바라본다면 그들의 정체성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될 것이다. 바로 사회적 약자들의 “매우 절실한 형태의 말 걸기”(116쪽)를 왜곡한다는 것이다.


일찍이 존 롤스는 『정의론』에서 ‘시민 불복종’에 대해 “법이나 정부의 정책에 변혁을 가져올 목적으로 행해지는 공공적이고, 비폭력적이며, 양심적이긴 하지만 법에 반하는 정치적 행위”라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법을 위반하는 것은 개인의 편리를 위해서 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달리 시민 불복종은 부당한 법에 대해 복종하지 않는 것이다. 시민 불복종이라는 뜻으로 보면 사회적 약자들의 행동은 결코 혐오스럽거나 폭력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정의로운 행동이다. 하지만 차별주의자들은 사회적 약자들이 과격한 방식으로 법을 위반했다는 것을 문제 삼으며 심판하려고 한다.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듯이 정의(正義)가 없다고 하면 그만큼 세상은 ‘기울어진 운동장’이 될 수밖에 없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공정한 삶을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위한 공동의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정치(政治)다. 우리 모두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가져야 한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사회적 약자들에게 비난의 눈초리를 보낸다. 그들이 특권을 주장할 때마다 마치 ‘특혜’을 받는다는 불편한 진실 때문이다. 이렇듯 특권을 악용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차별의 정치를 정지시키려면 마음의 정치를 해야 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임을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대면하게 되었다. 동시에 어떻게 해서 선량한 사람이 차별주의자인지 되물어야 했다. 차별주의가 ‘직접차별’이라고 한다면 선량한 차별주의는 ‘간접차별’에 해당된다. 간접차별은 사람은 저마다 고유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에 모두가 동일하다는 선량한 기준을 적용한다. 겉으로 보면 공정하지 않은가? 하지만 작가는 이러한 편향된 생각에 반대한다. 그러면서 “모두에게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기만 하면 공정할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차별이 된다.”(109쪽)고 말했다. 예를 들면, 공무원 시험을 보는데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같은 조건으로 하는 방식은 개선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차별이 공정하다는 시각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비정규직은 정규직이 아니라는 이유로 동일한 노동하면서도 동일한 임금을 받지 못한다.


이러한 차별 때문에 우리가 더욱 유의해서 살펴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우리를 지탱하고 있는 삶의 조건들이다. 우리 사회는 놀라운 경제발전을 통해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도 경제발전의 속도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하지만 살인적인 경쟁 속도의 부작용 때문에 경제발전이 사회발전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능력에 따라 경쟁에서 하는 것이 공정한 세상이라는 독특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경쟁에서 밀려난 사회적 약자들은 계층의 사다리에 오르지 못하고 잘못된 인간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들은 무능력하며 부적격자이기 때문에 그들이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다고 해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같은 주장에는 성장지상주의만 있을 뿐 인간의 존엄과 자유에 대한 고찰은 빠져 있다.


우리는 사회적 약자에 대해 반사적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우리 헌법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불평등을 사회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여긴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은 아주 일상적이고 구조적이며 은폐되어 왔다. 사회적 약자는 분명 법 안쪽에서 보호를 받아야 하는데 현실은 정반대다. 오히려 법 밖으로 밀려나 차별을 당하고 있다. 이 책에서도 명백히 드러나듯 이를 보여주는 사회적 지표들은 차고 넘친다. 이러한 부작용들이 결국 우리에게 국민은 평등하지 않다는 교훈을 뼈저리게 알게 해주었다.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우리는 “누군가를 차별하고 있다”가 아니라 “누군가를 차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라고 얘기해야 진실에 가까워진다. 우리의 욕망에서 선량한 차별주의를 찾아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인간다움’를 말할 수 있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나는 인간다움을 ‘선량한 양심주의자’라고 생각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시민 불복종』에서 모든 사람에게 양심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유인즉, “우리는 먼저 인간이고 그다음에 국민이 되어야 한다. 법을 존경하기보다 정의를 존경하는 편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선량한 양심주의자는 우리 모두의 은유다. 모든 사람에게 양심은 인간다움의 최고 정치다. 역설적으로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우리 모두의 책이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