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은 이번달 초 내내 출퇴근하며 '읽은' 책이다. 사실 나는 출퇴근을 자가로 운전하며 오가는 날엔 오디오북을 듣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날엔 종이책/전자책을 읽는 편이다. 이 책은 전자의 방식으로 접한 책이고 눈으로 읽기 보단 귀로 들었으니 읽었다고 하는 게 맞을까 싶긴 하지만, 삼십여 분 남짓의 시간 동안 고요한 차 안에서 오디오북의 나긋한 음성이 깔리면 귀로, 입으로 그 목소리를 따라가며 어떤 생각에 잠기곤 했다. 이 책을 읽고 김혜순 시인과 허수경 시인의 시집을 잔뜩 담았다.
이 책은 재밌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그간 드라마 보면서 남겼던 감상을 다시 정돈된 글로 정리를 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떤 특정 시기에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기록으로 남겨두는 게 의미가 꽤 큰 것 같아서. 더불어 더 많은 작품들을 접한 뒤에 저자의 (아마 다른) 산문을 다시 접해보는 게 좋으리란 생각도. 여담인데 요르고스 란티모스 굉장히 싫어하는 것 같아서 너무 웃겼다. 정갈한 언어로 사정없이 패는데 읽으면서 납득이 가서 더 웃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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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 ‘예술은 현실의 재현’이라는 유서 깊은 논의에서 ‘재현’이란 현상의 복사가 아니라 본질의 장악이다. 남길 것과 지울 것을 선택하는 지성이 필요한 일이다. 또 독자에게 고통을 전이시켜야 한다. 세상이 고통스럽다고, 고통스럽게 말해야 한다. 그것 없이는 인지의 충격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질의 장악’의 부산물이자 ‘인지의 충격’의 유발자로서의 고통, 그것은 옳다. 대상의 속성이 ‘선택인가 조건인가’의 문제도 중요하다. [...] 그 존재가 스스로 선택한 바 없는 자신의 ‘조건’은 웃음거리가 될 수 없다.
[...] ‘성명’은 출생과 동시에 ‘나’를 얽어매는 그 많은 이데올로기적 요구를, ‘병명’은 그 요구를 거절한 주체들을 분류하고 통제하는 폭력적 기준을 상징할 것이다. [...] 질병에 ‘나’를 꽂겠다는 것은 사회가 부여한 성명/병명을 반납하고 주체적인 성명/병명을 쟁취하겠다는 것이다.
[...] 흔히 인문학은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들 하는데, 윌리스에 따르면 그것은 곧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대해 '선택'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방법이란 곧 선택하는 방법이라는 것. 어떤 현실과 맞닥뜨렸을 때 이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다른 생각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늘 같은 방식으로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