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도 지지 않고 / 바람에도 지지 않고 / 눈에도 /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 튼튼한 몸으로 / 욕심은 없이 / 결코 화내지 않으며 늘 조용히 웃고 / 하루에 현미 네 홉과 / 된장과 채소를 조금 먹고 / 모든 일에 자기 잇속을 따지지 않고 / 잘 보고 듣고 알고 그래서 잊지 않고 / 들판 소나무 숲 그늘 아래 작은 초가집에 살고 / 동쪽에 아픈 아이 있으면 / 비에도 지지 않고, 가서 돌보아 주고 / 서쪽에 지친 어머니 있으면 / 가서 볏단 지어 날라 주고 /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 가서 두려워하지 말라 말하고 /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 별거 아니니까 그만두라 말하고 / 가뭄 들면 눈물 흘리고 / 냉해 든 여름이면 허둥대며 걷고 / 모두에게 멍청이라고 불리는 / 칭찬도 받지 않고 미움도 받지 않는 / 그러한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미야자와 겐지)
sns 친구 중에 정갈한 손글씨로 좋은 문장과 시 필사본을, 때로는 클래식을 직접 선곡해서 cd로 보내주시는 분이 있다.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언제 보낸다 말씀도 없이 보내 주시는데 정성어린 선물의 깊이와 귀함을 알게 해주시는 분이다. 이번에 도착한 필사본은 읽으면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주 가끔 그런 글을 만난다. 영혼을 울리는 글, 그 글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며 현재의 나를 자각하게 하는 글, 글쓴이의 마음과 삶의 태도가 그대로 전해져 오는 글… 미야자와 겐지의 시가 그랬다.
며칠 계속 시에 붙들려 있다가 혹시나 하고 미야자와 겐지의 시집이나 책이 있나 검색해보니 <비에도 지지 않고>라는 제목으로 그림책이 몇 권 있었다. 그 중에서 내가 고른 그림책은 미야자와 겐지의 시에 야마무라 코지가 시의 정서에 맞게 그림을 그린 그림책 공작소의 책이다. 한 페이지에 시 한 구절. 그리고 마지막 장엔 일어 원문과 번역된 영문본, 그리고 미야자야 겐지에 대한 옮긴이의 글이 실려 있다.
미야자와 겐지에 대해 자료를 계속 찾아보니 시는 그의 삶 자체였다. 37세에 급성 폐렴으로 죽기까지 동화와 농사 관련의 책을 쓰며 아이들과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살았던 그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은하철도 999>의 원작을 쓴 사람이기도 했다.
앞서 읽었던 <욕망과 영성>에서도 느꼈지만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도 모르게 남의 욕망을 모방하며 유행을 쫓고, 탐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나라고 그에 속하지 않을 리 만무한데, 그러한 욕망에 브레이크를 걸기 위해서는 잠시 멈춰서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침묵 속에서, 자발적 고독 속에서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런 중에 만난 미야자와 겐지의 시는 뭐랄까. 앞으로 침묵과 고독 속에서 이 시 하나만 붙들고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실제로 이 시는 시가 아니라 기도문이다. 원문을 찾아보니 불교식 기도문이 한 단락 더 있었다. “그러한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는 한 사람의 기도, 염원, 소망… 하루치의 양식에 만족하면서 동서남북의 어려운 이웃들을 찾아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마음으로 섬기고, 보듬어주고. 그렇게 또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나 칭찬도 미움도 받지 않고 그저 멍청이라고 불리우고 싶은 사람. 지금도 글을 쓰면서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 돌아보게 되는데,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고, 알아주기를 원하는 마음이 삐죽 솟아나와 나를 찌른다.
지금은 직장 안에서 관계와 크고 작은 문제를 통해 제대로 된 사람이 되어가는 훈련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제대로 된 사람이라는 말이 어떻게 읽힐지 모르겠지만, 어떤 순간에도 제대로 된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이해하면 좋겠다. 때가 되면 정말 내가 있어야 할 곳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칭찬도, 인정도 받지 않고 그렇게 사랑하고 보듬으면서, 같이 울어주고 같이 부대끼면서 살고 싶다. 정말, “그러한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이 시는 정말 신기하게도 읽을수록 울림이 깊다. 이 시를, 가볍게 지나치지 않고 마음 깊이 공감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선물하면 좋을 책이다. 좋은 시가 담긴 그림책을 선물하는 것이지만 그보다 더 깊은 인생의 의미를 선물하는 것일 테니까. 내게 찾아온 좋은 시가, 그리고 이 그림책이 더 좋은 쪽으로 나아가려고 매일 애쓰고 있는 좋은 사람들에게 계속 흘러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