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몇 장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이 책의 저자를 그다지 좋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좋게 말하자면 계급적 특권을 지닌 엘리트의 일상에 굳이 눈길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지만, 달리 말하자면 일종의 질투기도 했다. 미국의 명문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서양 고전학을 배운 국내 유명 문인의 딸. 나는 아버지가 물려 준 책장 무게만 1 톤인 저자에게 공감할 수 없었고, 이후 저자가 물건을 절약하기 위해 하는 고민들조차 위선으로 여겨지곤 했다. 할아버지가 바이올린을 사라며 3000 달러의 돈을 주셨다는 이야기가 좋게 들리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물론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용돈을 주는 것이 무슨 문제겠는가? 부유한 가정 환경 자체가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될 필요는 없겠지만, 졸렬한 사람 마음이 그런 것이다. 물건을 바라보는 태도는 비슷했지만, 결국 저자와 나는 처한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래서 나는 저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일종의 혐오라고 해도 할 말은 없었다. 나는 내 눈에 충분히 '가진 사람'올 보이는 그의 생활을 마음 깊이 옹호하고 공감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암에 걸려서 마음고생을 했다는 저자를, 고양이를 사랑하는 저자를, 어린 시절 큰 발 때문에 콤플렉스가 있었다며 페미니스트임을 고백하는 저자를, 윤리적 소비를 고민하는 저자를 미워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인터뷰도 찾아보았다. 역시 저자는 너무 좋은 사람 같았다. 저자에 대한 이런 양가감정 때문에 갈팡질팡하며 혼란스럽던 중, 책의 막바지인 217 페이지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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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저자 역시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힐튼 호텔에 대한 추억을 간직한 사람들에게 말이다. 책을 읽으며 지금껏 '질투'라는 감정을 인정하고 있지 않았었는데, 그제서야 확실하게 내 감정이 질투임을 알았다. 나는 만년필을 선물로 받곤 하는, 글을 쓰는 아버지에 대한 선망이 있었다. 책으로 가득 찬 서재에 대한 꿈도, 직접 건축 사무소에 맡긴 멋진 집에 사는 꿈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나의 인생과 아주 먼 삶이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 왔고, 살고 있는 당신. 당신에게도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겠지만, '좋은 사람'인 당신은 책에서 말했듯, 당신을 시샘하는 나를 비아냥거리고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조금은 당신을 향한 질투를 드러내도 되지 않을까? 당신에 대한 질투는 자기 발전의 촉매가 되어 더 발전된 나를 만들 테니까.
발가벗겨진 기분이다. 분명히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무거워지는지 모를 일이다. 누군가는 나의 삶을 보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을 텐데, 저자처럼 비아냥거리지 않고 원망하지 않을 자신도 없으면서 저자에게 내 좀스러운 마음을 드러내도 되는 걸까? 반사적으로 '불끈' 튀어나온 이 불편한 감정 때문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씁쓸한 끝맛이 나는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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