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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시,홍디자인님의 서재

하지만 옷을 다 입은 레이시가 나타났을 때, 나는 레이시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레이시의 차림은 업타운에서는 첨단이었고 다운타운에서는 고전이었다. 레이시는 두 세계 모두에 속해 있었다. 레이시는 어느 쪽에서도 자기 개성을 부정할 필요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여자였다. 난 이날 그걸 깨달았다. 하기야 전부터 레이시는 언제나, 심지어 상황이 안 좋을 때도 끼를 발산했다. 레이시는 진흙투성이 장화를 신고 길을 가다가도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사진 찍혀서 앞서가는 스타일로 소개될 타입이었다. 하지만 내 눈에 레이시가 어린 여자가 아니라 여자로 보인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레이시가 『타임스』에서 읽은 레시피로 박하술을 만들었고 우리는 창가에 있는 작고 동그란 탁자에 앉아서 할머니들처럼 홀짝거렸다. 집이 남향이어서 일몰이 임박하자 노을이 거리를 따라 쏟아지며 창문들을 황금색과 진주색으로 물들였다. 레이시는 어디로 가든 언제나 빛 한가운데 있었다. 의식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그런 건 일부러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이날 레이시는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웠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어퍼 이스트사이드로 갔다. 탤리 갤러리는 정장에 넥타이를 맨 사람들로 북적였다. 벽에는 조르지오 모란디의 절제미 있는 정물화가 걸려 있었는데 크기는 대부분 찻쟁반보다 클까 말까했다. 옅은 갈색들, 창백한 회색들, 부드러운 파란색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조용조용 속삭이게 했다. 고함을 치면 그림이 소스라치며 망가질 것 같았다. 모란디 그림에 있는 병과 카라페와 도자기 그릇들은 서로의 체온을 찾아 옹기종기 모인 작은 짐승들 같았다. 수줍은 그림들이었다. 하지만 피카소나 마티스 옆에 걸려도 꿀리지 않을 힘이 있었다.


레이시는 갤러리 안의 사람들을 훑어보다가 나에게 “우리, 여기서 뭐해?”라는 표정을 지었다. 참석자들 태반이 예순이 훌쩍 넘은 사람들이었다. 레이시는 금단추 달린 양복 상의와 체크무늬 바지와 풀 먹인 흰색 깃과 줄무늬 셔츠 차림의 남자들을 보다가 내게 말했다. “저 사람들 죄다 해군 제독이야?”

 

 

 

[조르지오 모란디, 「포도주 병이 있는 정물」, 1957년]  


탤리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레이시를 오랜 친구처럼 끌어안으며 유별나게 반가워했다. 함께 러시아로 모험을 떠났다 오더니 동지애가 눈부셨다. “모란디 말이야, 놀랍지 않아!” 탤리가 말했다. “모두 같으면서도 모두 달라. 내가 모란디로 시즌을 연 이유가 있어. 입이 떨어져야 비판을 하든지 할 거 아냐! 모란디 그림과 에드워드 호퍼 그림을 같은 방에 걸고 어느 그림이 더 침묵을 유발하는지 보고 싶어. 그건 그렇고 레이시,” 탤리가 화제를 바꿨다. “소더비에 있는 게 따분해지면 나한테 전화해. 나는 자네를 오만 가지로 써먹을 수 있어.”
탤리의 제안에 다른 흑심은 없었다. 레이시는 그걸 알기에 기분이 우쭐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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