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세 사람은 미술에 질렸고, 음식이 고팠다. 그들은 다시 현실 세계로, 사람들로 붐비는 그랜드 호텔의 중정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메리칸 샌드위치를 시켜먹은 뒤 오후 회의 전까지 각자 방에서 쉬었다.
오후 3시에 셋은 호텔 로비에서 만나 다시 차를 타고 에르미타주로 가서 이번에는 미술관장실로 안내됐다. 관장은 영어를 했고,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저희 그림 좀 보셨나요, 몇 점 안 됩니다만.” 관장이 농담을 던졌다. “이리 오시죠.”
관장이 넓은 도서관으로 통하는 옆문을 열었다. 책장이 방을 빙 두르고 있었는데, 허리 높이의 선반에 록웰 켄트 그림 여덟 점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린란드를 그린 대형 그림들이었다. 썰매개, 그린란드 사람들, 바다의 부빙들, 그리고 한밤의 태양. 맞은편 벽의 레일 위에는 러시아 화가 아이바조프스키(러시아 풍경화가)의 안개 낀 풍경과 마코프스키의 마을 풍경 열두 점이 놓여 있었다.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았다. 작은 것들은 바닥에 있었다. 켄트 그림과는 비교가 안 돼. 레이시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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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아이바조프스키, 「달빛에 물든 나폴리 만」, 1850년경]
“러시아에서 자국 미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관장이 말했다. 이 말을 신호로 협상이 시작됐다. 나름 흐루시초프 시대 쿠바 미사일 위기에 버금가는 긴박한 협상이었다. 레이시는 자신도 거기 있을 이유가 있다는 티를 내려고 열심히 기록하는 척했다. 45분이 흘렀고 양편 모두 지쳤다. 협상 결과는 회의 5분 만에도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러시아 그림 열두 개 대 켄트 그림 여덟 개 어때요?”
모두에게 보드카가 돌아갔다. 다들 가운데 테이블에 둘러앉아 웃고 건배하며 협상을 마무리 지었다.
(중략)
몇 분 후, 눈이 돌아가게 아름다운 흑발의 여자가 방에 들어왔다. 어찌나 미인인지 레이시는 평소답지 않게 의기소침해졌다. 레이시는 여신의 등장을 보는 남자들의 반응을 살폈다. 파트리스는 점잔을 빼며 의식하지 않는 척하는 반면, 탤리는 여자의 목과 무릎 사이를 연신 훑었다. 여자는 반 고흐의 수채화를 들여와서 레일 위에 올려놓았다.
“아이바조프스키 그림들은 내려놔요.” 관장이 말했다. “그편이 그 그림들한테도 좋겠어.”
흑발 미인은 양옆의 아이바조프스키 그림들을 바닥에 내려서 반 고흐 구아슈가 숨 쉴 공간을 만들었다. 관장이 탤리를 향해 말했다. “이 그림 아십니까?”
파란 바다 옆 노란 모래 위의 녹색 배를 그린 그림이었다.
길이 46센티미터, 폭이 61센티미터였고, 유리로 덮여 있었다.
“물론 압니다. 하지만 구아슈 기법이 쓰인 줄은 몰랐습니다. 놀랄 만큼 상태가 좋군요.” 탤리는 일어나서 그림을 가까이 관찰했다.
레이시도 가까이 갔다. ‘Vincent’라고 쓴 서명을 보니 반 고흐가 옆에 있는 느낌이었다. 그림은 반 고흐가 종이에서 막 붓을 뗀 것처럼 생생했다.
그림, 돈 그리고 음모
레이시 이야기
스티브 마틴 장편소설. 이재경 옮김. 480쪽. 홍시.
방안의 다섯 사람 사이에 갑작스런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가만히 있고 싶은 욕구가 동시에 모두를 덮친 것처럼 몇 초간 미동 없이 서 있었다. 그리고 몇 초간 다들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이것은 파는 물건이 아니었다. 거래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 수준을 뛰어넘었다. 반 고흐가 직접 그림을 그들 앞에 놓아준 것 같았다. 그들만을 위해서, 그들만 보라고 있는 것 같았다. 신성한 순간이었다. 이렇게 짧은 조우에도 정이 들었다. 그림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모두들 조용했다. 그림이 침묵으로 말을 걸었다. 그 순간에 납득될 수 있는 언어는 침묵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