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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시,홍디자인님의 서재

레이시는 사무실을 가로질러 체리의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록웰 켄트(미국의 화가 겸 삽화가)가 누군지 알아?” 체리가 물었다.
“조금요.” 레이시가 말했다.

“『모비딕』 삽화를 그린 사람 아닌가요? 화가이기도 하고요.”
“주로 화가지.” 체리가 대꾸했다.

“미국 최고의 화가 축에는 못 들지만, 그림이 워낙 귀해. 켄트는 거장 로버트 헨리(미국의 사실주의 화가)와 인연이 있고, 로렌 해리스(캐나다 풍경 화가들의 그룹인 '그룹 오브 세븐'의 일원) 쪽과도 관계가 있어. ‘그룹 오브 세븐’ 알지? 풍경화가들 말이야. 켄트의 그린란드 풍경화가 유명해. 얼어붙은 피오르드를 배경으로 에스키모인들과 에스키모개들을 깨알처럼 그렸어. 켄트가 살아 있을 때, 그림은 찬사를 받았지만 정작 그림을 사는 사람은 없었어. 켄트가 공산주의 동조자로 몰렸거든. ‘인민’의 친구였다고 할까. 그래서 주요작들을 켄트 본인이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어. 그러다 1950년대 러시아 동조자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했을 때 켄트가 미국에 대한 반발심리로 그림들을 거의 다 러시아에 기증해 버렸어. 정말로 ‘러시아 인민’에게 줘버린 거지. 안 그래도 밉보였는데 제대로 찍혔어. 하지만 40년 전 얘기야. 지금은 켄트의 공산주의 성향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삽화 같은 자잘한 것 말고, 제대로 된 록웰 켄트 그림을 원하는 사람들이 생겼어. 그럼 뭐해. 구할 수가 있어야지. 그런데 정작 켄트에는 관심도 없는 러시아에 큼지막한 켄트 그림이 여든 점이나 잠자고 있단 말이지.”

 

 

 

[록웰 켄트,「11월의 그린란드」, 1932년]


체리는 말을 마치고 서류를 뒤적였다. 나머지 얘기는 레이시가 알아서 파악하라는 듯이. 레이시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레이시는 그 생각을 말했다.
“값이 얼마나 나가는데요?”
“최고작의 경우 40만에서 60만 달러.”
“곱하기 80.” 레이시가 말했다.
“그건 아니지.” 체리가 말했다. “그림들을 시장에 한꺼번에 내놓을 수는 없거든. 그리고 개중에는 수준이 떨어지는 것도 있을 테고. 하지만 알아주는 미술관들에 몇 작품 걸고, 매년 한두 작품씩 시장에 풀면 꾸준한 금맥이 되겠지.”
레이시는 그 금맥을 잡을 사람이 누굴까 생각했다. “우리가 러시아에서 빼내올 순 없어요?”
“그게 바로 우리가 알아봐야 할 일이야. 월요일에 바튼 탤리를 만나 볼래? 그쪽 갤러리에서. 오전 11시쯤.”

 

 

 

 

그림, 돈 그리고 음모

레이시 이야기

스티브 마틴 장편소설. 이재경 옮김. 480쪽. 홍시

 


레이시에게 그 주 주말은 유난히 길었다. 레이시는 록웰 켄트 회수 작전에 자신이 어떤 식으로 개입하게 될지 못내 궁금했다. 그리고 흥분됐다. 이번 임무는 승진과 연결될 수 있었다. 잘만 하면,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사다리타기식 승진이 아니라, 단걸음에 무대 중심으로 훌쩍 도약할 기회가 될 수 있었다. 레이시는 원래 대담무쌍하게 주인공에게 접근하는 스타일이었다. 다만 상대는 레이시가 접근한 게 아니라 자기가 발견했다고 믿었다. 그렇게 믿게 하는 것도 재주였다. 하지만 소더비의 촉수는 불시에 날아들었다. 그 촉수가 약이 될지 병이 될지도 알 수 없었다. 탤리가 체리에게 전화했고 체리는 레이시를 추천했다. 레이시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하지만 어떤 업무에 추천했는지는 미지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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