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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시,홍디자인님의 서재

레이시는 국립미술관 때와 마찬가지로 허시혼 미술관을 빠른 속도로 훑었다. 머리를 앞뒤로 돌려가며 명작들 앞을 달렸다. 그때 한 작품이 그녀의 발을 붙들었다. 에드 루샤(미국의 팝아트 미술가)의 1967년도 작품으로, 대형캔버스에 불타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을 그린 그림이었다. 그림 속 미술관 주변에는 인적이 없었다. 미술관 건물만 섬뜩한 색조와 또렷한 윤곽을 과시하며  서 있고, 건물 뒤편에서 불길이 일고 있었다. 이 그림은 레이시가 앞서 봤던, 불탄 들판처럼 형체 모를 추상화들과 정반대였다.
추상화는 감성적인 반응을 요했다. 반면 이 그림은 지적인 반응을 요했다. 내가 지금 보는 것이 비극적 이미지인가? 아니면 초현실적 이미지인가? 건물 안에서 벌어지고 있을 아비규환은 전혀 드러나 있지 않았다. 그 부분은 오로지 보는 이의 상상에 기대고 있었다. 건물 안에 사람들이 있기는 한 걸까? 그림 앞에서 이런 질문들을 던지며 생각이 굳어지기를 기다릴 때였다. 갑자기 레이시의 마음이 철커덕 생각을 멈췄다. 질문들이 멈췄다. 잠시 동안 그녀의 뇌가 부글거리는 것을 멈췄다. 레이시는 그림을 그저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불타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에드 루샤, 1968년

 

레이시는 허시혼 미술관 휴대품 보관소로 향하며 손목시계를 흘깃 보았다. 이번에도 애브리 그림이 말썽을 일으켜 시간을 잡아먹으면 큰일이었다. 이제는 정신 차리고 기차시간을 챙겨야 했다. 이번엔 아무 일 없이 무사히 그림을 회수했고, 트루먼이 그녀를 태우고 지체 없이 기차역으로 달렸다.
레이시는 다시 기차로 몇 시간을 달려서 밤 10시에나 아파트에 도착했다. 그림을 여전히 끌고 다니는 신세였다.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스카치위스키 생각이 간절했다. 레이시는 얼음 위에 한 잔 따라서 침대에 드러누웠다. 여름철 나뭇잎에 분산된 가로등 불빛이 방 안으로 들어와 어른어른 움직였다. 레이시의 몸은 알코올이 들어오기도 전부터 술 생각에 반응하다가 술이 혀에 닿기 무섭게 나른해졌다. 살짝 열린 창틈으로 여름 밤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레이시의 시선이 어둑한 방 안을 정처 없이 헤맸다. 위로, 아래로, 꽃병에서 작은 부엌으로, 사진으로, 램프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벽장문으로, 그리고 거기 기대놓은 애브리 그림으로 흘렀다. 그림이 우리 집에 있어. 레이시가 생각했다. 그림은 걸어야 맛이지.
레이시는 그림의 포장을 조심조심 벗겼다. 워싱턴 국립미술관 사람들이 끄를 때보다도 조심해서 끌렀다. 그리고 그림을 벽에 걸었다. 레이시는 서랍장 위의 램프를 가져다가, 그림 앞 낮은 걸상 위에 놓아서 빛이 그림을 아래에서 위로 비추게 했다. 그런 다음 다시 드러누웠다. 레이시는 보지도 않고 손을 뻗었다. 스카치위스키 잔에 손이 정확히 얹혔다.
(중략)

 

 

 

 

 

레이시 이야기 : 그림, 돈 그리고 음모

스티브 마틴 장편소설, 이재경 옮김.

 


아트비즈니스에 들어온 지 2년이었다. 그동안 레이시가 깨닫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이 순간 레이시는 그게 무엇인지 절실히 깨달았다. 이 예상치 못한 교감의 순간에, 이 짧은 몇 분 동안, 레이시는 사람들이 왜 미술품을 소장하고 싶어 하는지 깨달았다.
레이시는 다시 방을 둘러보았다. 전에는 평범한 사진과 부엌과 꽃병이었던 것들에 지금은 형용사가 붙었다. 애송이의 사진, 애송이의 부엌, 애송이의 꽃병. 반면 애브리 그림은 어른의 물건이었다. 어른의 눈에 위한, 어른의 눈을 위한 것이었다. 이 아파트, 여기 물건들은 순식간에 레이시의 과거가 되었다. 그것들은 퇴장해야 할 것들이었다. 팔아버리거나 상자에 넣어 치워버릴 것들이었다. 레이시는 애브리 그림을 통해 위험한 영약을 맛봤다. 레이시는 애브리 그림처럼 고급스러운 것들, 아름다운 것들을 갖고 싶었다. 어른이 되고 싶었다. 더는 애송이로 살기 싫었다. 이제 레이시에게 필요한 것은 급격히 높아지는 눈을 받쳐줄 돈이었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이제껏 흑백으로 나눠져 있던 윤리관을 애매한 회색으로 칠해야 했다. 레이시는 그동안 머릿속에 가설처럼 세웠던 검은 생각을 실행에 옮길 필요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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