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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시,홍디자인님의 서재

넓은 복도 끝에 너무나 눈에 익은 그림이 나타났다. 레이시는 숨이 턱 막혔다.

“이걸 좀 봐요.” 알버그가 말했다. “내가 무릎만 성했어도 이 앞에 무릎을 꿇었을 거요.”


존 싱어 사전트, 「엘 할레오」, 1882년


그들 앞에 사전트의 「엘 할레오El Jaleo」가 있었다. 폭이 3.5미터나 됐다. 레이시는 이 그림이 이렇게 거대할 줄 상상도 못했다. 잘못 다가섰다가는 그림이 집어삼킬 것 같았다. 그림 전면에 에스파냐 무희가 있었다. 무희는 머리를 한껏 젖히고, 캐스터네츠를 쥔 손을 앞으로 쭉 뻗고, 다른 손으로는 하얀 드레스 자락을 멋스럽게 들어 올리며 열정적으로 스텝을 밟고 있었다. 무희 뒤에는 기타를 든 남자들이 나란히 앉아 플라멩코 리듬을 연주했다. 그림에서 플라멩코 선율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무희 뒤에 박수하는 남자도 있었는데 남자의 박수가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짝 하고 울렸다. 반면 코를 고는 남자도 있었다. 불이 난 것처럼 아래쪽에서 빛이 올라와 방 전체로 퍼지고, 무희 뒤로 거대한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춤과 악사들과 구경꾼들의 흥분감과 열기가 손에 잡힐 듯 전달됐다.

그림은 레이시 안에 도사린 모험에 대한 갈증을 뜨겁게 일깨웠다. 현세의 보스턴을 여행하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었다. 레이시는 다른 세기에서 보내는 음탕한 저녁을 갈망했다. 가파르게 뒤로 젖힌 머리. 현란하게 움직이는 캐스터네츠. 쭉 미끄러지는 다리. 그리고 더는 산 자의 땅에 있지 않은 젊은 남자들과의 섹스. 그때 조슈아가 레이시 쪽으로 기대며 속삭였다. “드레스가 환상적이네요.”

힌튼이 입을 열었다. “놀라운 것은, 사전트가 이 그림을 파리의 스튜디오에서 기억을 더듬어 그렸다는 거야.”

“알버그 씨…….” 레이시가 말했다.

“알버그 씨?” 알버그 씨가 대꾸했다. “그게 누구야? 힌튼이라고 불러요.”

“어떻게 그런 걸 다 아시죠?”

“어이, 내가 말했잖아요. 나는 다 사랑한다고.”

코넬리아가 끼어들었다. “모아들이는 데 있어서는 이이가 국세청보다 나아요.”

“그럼 왜 현대미술을 모으시죠?”

“이런 그림들은,” 힌튼이 벽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끽해야 2년에 한 점 또는 두 점밖에 못 사요. 너무 희귀해. 반면 현대미술은 싸. 온종일 살 수도 있어. ‘수집가’란 말은 나한테 과해요. 난 쇼핑객이야.”




레이시 이야기: 그림, 돈 그리고 음모

스티브 마틴 장편소설, 이재경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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