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홍시,홍디자인님의 서재

톰 프리드먼, 「무제」, 1994년


1990년대 말이 되자 아티스트들의 결과물은 거대한 것부터 눈곱만한 것까지, 정교한 것부터 날림까지, 사려 깊은 것부터 지각없는 것까지 다양해졌다. 리처드 세라는 무게를 톤 단위로 매기는 작품을 만드는가 하면, 톰 프리드먼은 아스피린 알약에다 자화상을 조각했다. 작품은 아티스트 본인의 성적 취향과는 상관없이 마초적인 것부터 야릇한 것까지 다양했다.

이 와중에 파일럿 마우스가 동네마다 다니며 벽과 문에다 검정 스프레이로 박쥐를 그렸고, 그게 눈에 띄어서 미술계에 어물쩍 이름을 알렸다. 그는 제프 쿤스.와 데미언 허스트..를 롤모델 삼아 예술적 난동을 돈벌이로 바꿨다. 파일럿 마우스는 버려진 창고를 개조해 아트 팩토리를 가동했다. 자원봉사자 조수들로 바글대는 그의 스튜디오는 그림과 조각들을 연신 찍어냈고, 비평가들의 서슬 퍼런 비난에도 미술시장은 그에게 현금으로 답했다.

파일럿 마우스가 결정적으로 뜬 데에는 정력적인 수집가 힌튼 알버그의 공이 컸다. 영국에 찰스 사치•가 있다면 미국에는 알버그가 있었다. 알버그가 다운타운의 어떤 이름 없는 기획전에 들이닥쳐서 마우스의 그림을 하나도 남김 없이 몽땅 사들였다. 돌이켜 생각하면 별로 좋은 그림들도 아니었다. 하지만 힌튼 알버그가 사들이자 갑자기 좋은 그림이 되었다. 상대성이론은 미술에도 강력히 적용된다. 중력이 공간을 비틀 듯 영향력 있는 수집가는 미학 기준을 비튼다. 차이점이 있다면 중력은 공간을 영구히 일그러뜨리고, 수집가는 미학을 기껏해야 몇 년 왜곡할 뿐이다.





레이시 이야기: 그림, 돈 그리고 음모

스티브 마틴 장편소설, 이재경 옮김



하지만 알버그의 구매 자체가 파일럿 마우스를 스타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그가 그림을 사가고 몇 주 후에 알려진 사실이 마우스에게 최소 10년짜리 아트 스타 자리를 보장했다. 그런데 그 얘기를 하려면 힌튼 알버그의 기이한 버릇부터 알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힌튼 알버그는 지갑을 빨리 열기로 유명한 수집가였다. 돈 받는 쪽에서야 그저 기쁠 따름이었다. 알버그는 뉴욕 현대미술관, 디아 미술재단, 휘트니 미술관은 물론이고, 색다른 비주류 미술 행사들도 많이 후원했다. 따라서 신진 미술과 기성 미술을 막론하고 뉴욕 미술계 동향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알버그는 체형이 볼링핀을 닮았는데, 가끔은 무심코 옷까지 볼링핀처럼 입었다. 특히 흰색 양복에 널찍한 붉은색 혁대를 차면 영락없었다. 그의 아내 코넬리아는 남편이 불룩한 부분은 들어가고, 들어간 부분은 불룩해서, 둘이 나란히 서 있으면 텍사스와 루이지애나처럼 딱 들어맞았다.

알버그가 얼굴을 내미는 곳마다 뒷소리가 높았다. 대개는 흉보는 소리들이었다. 하지만 마냥 조롱당하기에는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았다. 힌튼 알버그에게는 적어도 본인의 수집벽을 솔직히 인정하는 유머 감각이 있었다.

“작년에 내가 바젤 아트 페어에 갔잖아. 출발하기 전에 코넬리아가 이번엔 좀 작작하라고 하더군. ‘죄다 사지는 말아요, 여보?’ 하길래 내가 그랬지. ‘여보, 내가 미친놈인 거 몰라?’”

알버그는 그림으로 미어터지는 자기 집 창고를 ‘보석으로 가득한 쓰레기장’ 또는 ‘쓰레기로 가득한 보물창고’라고 불렀다. 하지만 알버그는 어떤 면에서는 숫기가 없었다. 그 탓에 정작 그의 유머 감각은 아는 사람만 알고 미술계 주류까지는 파고들지 못했고, 돈 자랑한다는 조롱만 무성했다. 알버그의 재산도 알고 보면 자동차산업으로 벌어들인 처갓집 돈이라는 놀림도 빠지지 않았다.

힌튼 알버그의 기벽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그는 술을 즐기지 않았고, 다른 어떤 것도 남용하지 않았지만, 음식에는 사족을 못 썼다. 거기다 선천적 재주인지 후천적 노력인지 몰라도 후각이 놀랍게 발달해서, 음식을 입으로 삼킬 뿐 아니라 코로도 흡입했다. 식사가 시작되면 그는 접시 위로 몸을 잔뜩 숙이고, 때로는 냅킨까지 머리에 덮어쓰고 아로마틱 벨을 형성한 뒤 음식 냄새를 깊고 길게 들이마셨다. 건너편에서 보면 음식 위에 기절하는 올리버 하디•처럼 보였다. 본식 때만 그러는 게 아니었다. 애피타이저에서 디저트까지, 뭐든 먹거리가 나타날 때마다 똑같이 행동했다. 칵테일 파티에서 사람들 사이로 오르되브르 접시가 돌 때, 알버그가 거기 대고 코를 문지른다고 생각해 보라. 역겨운 일이었다. 알버그가 매디슨 애비뉴의 어떤 타운하우스에서는, 이탈리아 골동품 탁자의 밑면을 킁킁 댔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알버그가 전시회를 싹쓸이한 후 파일럿 마우스가 이런 후일담을 늘어놓았다. 알버그가 갤러리에 온다는 소식을 접한 마우스는 직접 갤러리로 가서 그림들을 모두 벽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림 뒷면 캔버스 틀에다 송로버섯 오일을 톡톡 바르고 다시 걸었다. 그 이야기가 기사로 떴다. 마우스는 『뉴욕타임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자신은 돼지가 가장 좋아할 냄새를 풍기는 그림을 만들어서 돈 냄새를 풍기는 수집가들을 조롱한 것뿐이라고 했다.

파일럿 마우스는 이 말로 스타가 되었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