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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시 이야기: 그림, 돈 그리고 음모

스티브 마틴 장편소설, 이재경 옮김



뉴욕 최고의 경매회사 소더비와 크리스티는 하버드와 그 비슷한 대학들을 갓 졸업한 젊은 인재들에게 입사 희망 1순위 회사였다. 거기서는 미술사 전공자가 마케팅 전공자보다 우대받았고, 남녀를 불문하고 용모가 많이 단정해야 했다. 경매회사들은 직원들도 번지르르하기를 바랐다. 그런 직원들이 전시회 때 서류와 팩스와 슬라이드를 팔에 안고 붐비는 갤러리를 누볐다. 하지만 연봉은 쥐꼬리였기 때문에 젊은 직원들은 보통 부모에게 손을 벌리고 살았다. 그래도 부모들은 자식들이 거기 다닌다면 뿌듯이 여겼다. 일단 이름만 대면 아는 회사들인 데다 만국의 돈이 공기를 후끈 달구는 화려한 업종이기 때문이었다. 돈이 모이는 것은 같지만 경매회사들은 어쩐지 월스트리트의 금융회사들처럼 지루해 보이지 않았다. 딸 가진 부모 생각에는, 유리천장과 성희롱이 곧바로 연상되는 금융권보다야 나았다.

소더비는 사람들이 유럽식 말씨로 예술 사조를 논하고, 물려받은 돈부터 금융자금까지 각종 돈다발이 고급 양복과 실크 넥타이 차림으로 공존하는 기관이었다. 그곳은 산뜻하고 깔끔한 뉴욕을 대표했다. 거기 직원들은 매일 빼입고 출근해서, 담배 연기 없고 약물 없고 오직 흉상과 청동과 억만장자들로 가득한 천장 높고 유서 깊은 건물에서 일했다. 하지만 부모들이 모르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퇴근 후와 주말에는 자식들이 세잔과 마티스의 품을 떠나 어둠의 세계에 합류한다는 점이었다. 날이 저물면 자기 자식들도 다운타운에 모여서 록밴드에 들어간 자식들과 하등 다를 바 없이 산다는 것을 부모들은 몰랐다.

레이시가 소더비에서 처음 배정받은 곳은 작품보관소였다. 한적하고 휑하고 어둑한 지하층에서 19세기 그림들의 목록을 만들고 크기를 재는 일이었다. 선적서류와 나무궤짝 틈에서 도나카란 정장은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였다. 하지만 레이시는 가끔이라도 4층 사무실로 올라갈 때를 대비해 항상 옷에 신경 썼다. 대학 시절이 미술의 고급 과정이었다면, 소더비의 지하실은 미술의 기본기를 생으로 닦는 과정이었다. 레이시는 융단을 깐 테이블 위에 그림을 차례로 올려놓고 뒤판을 줄자로 쟀고, 잰 것을 빠짐없이 적었다. 다음에는 그림을 다시 앞으로 돌려서 화가의 서명과 모노그램을 찾았고, 마구 휘갈겨 쓴 이름을 판독했다. 그리고 무명의 화가를 찾아서 들기도 버거운 미술 인명사전을 뒤졌다. 성공하면 상급자에게 작가불명이던 작품의 작가를 보고해서 점수를 땄다. 입사 첫 1년간 레이시는 수천 점에 달하는 그림의 앞뒤를 살폈다. 일단 그림을 타진하는 법을 터득했다. 노크하듯 두드렸을 때 캔버스가 단단하고 팽팽하면 원래 있던 캔버스 위에 다른 캔버스를 덧댔다는 뜻이고, 그것은 그림 상태가 나쁠 거라는 경고였다. 광택제를 먹여서 원화로 가장한 프린트[원화를 필름으로 찍어서 출력한 이미지를 말한다. 화가나 미술관이 한정 수량으로 제작한 프린트는 가치가 높다.]를 골라내는 법도 익혔다(소장품이 진품이라고 믿었던 위탁자에게는 비극이지만). 돋보기로 들여다보면 인쇄물 특유의 미세한 점들이 보였다. 에칭화와 석판화도 구별하게 됐다. 에칭의 경우 강한 불빛을 그림 표면에 비추면 부식작용으로 생긴 선들이 만드는 미세한 그림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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