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관련 일을 해본적 없는 일반인의 입장에서 내가 가본 가장 인상적인 두 건축가의 전시회가 있는데 그 하나는 르 코르뷔지에이고 다른 하나가 작년에 서울에서 있었던 헤더윅의 전시였다. 어떤 이론과 배경을 알고 있는 상태가 아니어도 우선 헤더윅이 디자인한 건축물들은 한눈에 달랐다. 런던에 있는 그 유명한 'rolling bridge (접었다 폈다 할수 있는 다리)' 만 봐도 그의 상상력이 남 다름을 알 수 있듯이 그의 디자인은 대담하고 아름다웠다.
그런 그가 2025년 서울 노들섬 프로젝트 설계 프로젝트 공모전에서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어서 2025년 서울에서 열리는 제5회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았다는 소식이다. 한국에 관심이 많은가보다.
작년 말에 나온 이 책 <더 인간적인 건축>에는 그가 추구하는 건축디자인의 핵심이 들어가있다. 원제는 Humanise. 사람의 감정과 특성을 부여하여 디자인하자는 얘기이다.
원래 대학에서 건축이 아닌 디자인을 전공하던 헤더윅은 디자인의 대상을 건축으로 보고 시도하기 시작한다. 우연히 가우디 건축물 사진을 책에서 보고 충격을 받은 후였다. 후에 그는 직접 가우디의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을 방문하여 보고 넋을 잃었다고 했다. 크기만 하고 멋없는 건물 (높이와 층수만 자랑하는 요즘 건물들처럼)이 아니라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 사람의 삶에 무언가를 더해주는 건물이라고 했다.
기술이 훨씬 발달한 현대에 와서 오히려 인간의 감정을 외면하고 효율성과 비용만 생각하는, 어딜가나 비슷비슷한 건축이 팽배하게 되었다. 바로 20세기 불어닥친 모더니즘때문이다.
마린빌딩과 까싸 밀라가 한창 지어지고 있던 20세기 초 어느 순간 건물에 관한 우리의 사고방식에 믿기지 않는 혁명이 일어났다. 건물이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를 말하는 급진적이고 새로운 발상이 학계와 전문가 집단을 휩쓸었고 곧 세계를 장악했다. (52)
모더니즘!
1차세계대전을 겪고 난 후 세계는 재건이 중요한 이슈였고 불필요한 것을 배제하고 효율을 중시하는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음악은 무조로 바뀌었고 시인은 운율과 운문 구조를 포기했으며 화가는 불필요한 디테일을 없애고 보다 근본적인 형태를 드러내고자 했다. (186)
결과는, 재앙이었다고 헤더윅은 말한다. 모더니즘 열풍 탓에 감정은 배제되고 생각만이 남아 예술가의 촛점이 마음에서 머리로 올겨갔고 아름다움을 파괴하려는 욕망이 현대 미술의 자리에 들어섰다고 했다. 건축사에 있어서 이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르 코르뷔지에, 건축을 모더니즘의 세계로 끌어들인 사람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된 세계에서 최고로 중요한 것이 기능이라고 믿었고 건물의 용도가 건물의 진실이라고 믿었던 사람이다.
감히 헤더윅은 르 코르뷔지에를 '따분함의 신'이라고 한다. 그의 이론이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따분하고 인간성은 배제된 건축물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고 이 따분함과 지루함때문에 건물은 40년을 못넘겨 재건축의 길을 밟게 된다는 것이다.
르 코르뷔지에의 신념 중 하나는 '건물은 대량 생산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건축물을 사용하는 사람을 포함해서 대중은 시각적으로 복잡한 양식의 건물을 선호하지, 장소성이 드러나지 않고 기능에 집중하여 설계된 건축물에서 따분함을 느낀다고 헤더윅은 재차 강조한다. 즉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현대의 건축이 이렇게 되어버린데에는 모더니즘과 더불어 일률적인 교육 시스템에도 원인이 있다고지적한다. 대학에서의 건축 교육, 그리고 일정 조건의 자격을 갖추어야 건축가라는 신분을 달아주는 현재의 시스템은 상향바보화된 건축 전문가를 양상했으며 교육의 탈을 쓴 사상 주입 과정은 건축 교육이 창의성이 아닌 맹목적 순응을 조장할 수 있다고 했다
따분함이라는 전 지구적 재앙에서 벗어나기 위해, 즉 일부 건축 전문가가 아닌 그저 지나가는 행인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건물을 디자인하기 위해서는 '달리 생각하는 능력'을 갖추라고 했다.
건물은 곁을 지나치는 행인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인간화 (Humanise) 원칙이라고 부르고, 그러기 위해선 다음 세가지 간격에서 두루 흥미로워야 한다고 했다.
1. 도시 간격 (40m 이상)
2. 거리 간격 (20m 이상)
3. 문가 간격 (2m 내외)
건물은 가까이 가기 전 멀리서 볼때 벌써 경험이 시작되고 (도시 간격), 이내 길 건너편이나 길 아래에서 건물을 바라보며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고 (거리 간격), 건물에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또 새로운 경험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문가 간격).
건물은 프랙탈처럼 가까이 다가갈수록 스스로를 펼쳐 더 많은 것을 드러내야 한다. (350)
오히려 전 세계적으로 옛날에 지어진 건물들은 그 장소의 특징 (장소성)을 드러내고 그곳의 문화를 반영하며 그 안에서 살거나 일하는 사람들과 교류가 일어나도록 품어줄 수 있는 특징을 가졌다고 했다. 이윤 위주, 기능 위주의 현대 건축물이 잃어버리고 있는 점이다.
이 책의 내용도 재미있었지만 이 책의 구성과 프린팅 방식도 헤더윅 답게 따분하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거의 500쪽에 이르는 책을 읽으면서 전혀 지루한지 모르고 금방 읽을 수 있었으니까.
일반인, 즉 헤더윅이 말하는 '행인'의 입장에서 나도 가끔 거리를 가다가 거의 비슷한 구조와 외관, 비슷한 층수로 지어지고 있는 아파트들을 보며, 예전의 아파트들보다 더 천편일률적으로 짓고 있다는 생각을 할때가 있다. 정해진 면적의 땅에, 최대한의 이윤을 남기기 위해 따분하고 일률적인 건물들이 건축가라는 전문가들과 건축주에 의해 기획되고 마구잡이로 지어지고 있는 것이다. 도시와 도시의 차이가 없어지고 인간들은 그저 그 안에 들어가 일정 시간 보내며 기능적으로만 교류할 뿐이다.
헤더윅이 올해 서울에서 보여줄 두 가지 큰 프로젝트가 기대된다.
- 이 책에 대한 의문점: 번역자 소개가 없다. 겉표지도 아니고 안쪽 페이지에 조그많게 '옮긴이 한진이'라고 되어 있는게 전부. 혹시 'AI'한테 번역을 맡겼나?
- 이 책에 대한 유감: 도대체 500여쪽에 이르는 두툼한 책을 이렇게 제본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책 양쪽에 각각 문진을 올려놓아도 휘리릭 넘어가고, 책받참대에 올려놓아도 고정이 안된다. 리뷰쓰는 동안에도 옆에 펼쳐놓고 보면서 쓰는데 아주 애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