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번 읽을 책을 네가 한번 골라줘볼래?"
부탁했더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중에서 아들이 골라준 책이 <파리의 우울>이다.
왜 이책이냐고 물었다.
아들이 대답하길, "파리는 우울한 도시가 아니잖아요."
보통 사람들이 알고 있는 파리는 우울한 도시가 아닌 것에 반해 이 책에선 우울하다고 했으니 무슨 내용인지 읽어볼만하지 않겠는냐는 뜻이다.
사실 아주 오래 전 최영미 시인이 '예술가의 초상'이라는 제목으로 렘브란트와 보들레르에 대해 발표한 글 ('창비문화' 1995년 1-2월호)을 읽어 알게 된 이후로 이 책은 처음부터 찬찬히 읽어보질 않았을 뿐 내게 생소한 책은 아니다.
그 때 밑줄을 그어놓았던 부분이 보들레르의 시 '새벽 한시' 중 일부분이었다.
내가 사랑했던 자들의 영혼이여, 내가 찬양했던 자들의 영혼이여, 나를 강하게 해주소서. 그리고 세상의 허위와 썩은 공기로부터 멀게 해주소서. 그리고 당신이여. 나의 신이여. 내가 형편없는 인간이 아니며 내가 경멸하는 자들보다도 못하지 않다는 것을 나 자신에게 증명해줄 아름다운 시 몇편을 쓰도록 은총을 내려주소서.
내가 여기 밑줄 그으며 읽은 때가 1997년, 20대 후반이었을 때딘데 지금도 어렴풋이 알것 같다 무슨 맘으로 밑줄을 그었는지.
보들레르. 1821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재혼. 경제적으로 부족한 환경은 아니었으나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젊은 시절 술과 여자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20대 중반에는 자살 기도를 하기도 했으며 잡지에 미술 비평 글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여기 저기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고 1857년 그의 나이36세에 그 유명한 시집 <악의 꽃>을 출간하였다. <파리의 우울>은 처음에 <소산문시집>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가 제목을 바꾸어 발표한 산문시집이고 그의 나이 43세때였다. 마비 증세와 실어증 증세를 보이다가 46세에 세상을 떠났다.
소산문시 (Petits poems en Prose). 책을 펼쳐보면 시처럼 보이는 글은 없고 거의 대부분 산문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새로운 장르의 산문 혹은 새로운 장르의 시라고 봐야할지. 보들레르 자신이 직접 소산문시라고 붙였으니 그렇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한편의 소설, 두편의 에세이가 남겨져 있지만 보들레르의 대표작이라면 <악의 꽃> 과 더불어 이 책 <파리의 우울>이라고 할 수 있는데 10년 간격으로 발표된 두 책은 매우 닮아있어서 실제로 이 책 <파리의 우울>에는 50편의 소산문시가 실려 있는데 각각에 역자의 주석이 달려있고 상응하는 <악의 꽃>에 실린 시 구절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수수께끼 같은 친구여 말해보아라, 너는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 아버지? 어머니? 누이나 형제?
나에겐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이도 형제도 없소
-친구들은?
당신은 오늘날까지 내가 그 의미조차 모르는 말을 하고 있구려.
-조국은?
그게 어느 위도 아래 위치하는지도 모르오.
-미인은?
불멸의 여신이라면 기꺼이 사랑하겠소만
-돈은 어떤가?
당신이 신을 싫어하듯, 나는 그것을 싫어하오
-그렇군. 그렇다면 너는 도대체 무엇을 사랑하느냐, 불가사의의 이방인이여?
나는 구름을 사랑하오 흘러가는 구름을 저기 저기 저 찬란한 구름을.
('이방인' 전문)
아버지, 어머니, 형제, 조국, 여인, 신, 모두를 거부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흘러가는 구름'이다. 이 이방인의 정체는 시인 자신일 것이다. 피를 나눈 가족은 물론 속인의 무리에서 스스로를 따로 떨어뜨려놓고 생각하는 '고독'은 보들레르 시의 키워드를 이루고 있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불멸의 여신이나 흘러가는 구름처럼 불멸이어야 한다. 초자연적이어야 한다. 실제로 보들레르는 자연을 본능, 욕구와 같은 차원으로 보았고 자연은 인간에게 욕구 충족을 위한 범죄를 부추길 뿐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했다. 자연은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근본적인 본능이며 이런 본능이나 자연스런 충동에 자신을 맡기는 것은 영혼과 정신이 결여된 동물과 다를바 없다고 하였다. 잘 알려진대로 보들레르의 여자에 대한 무시와 경멸은 이런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과 같은 차원으로서 여성은 정신적 욕구 없이 자연스런 욕구만 충동하는, 천박하고 혐오감의 대상이라고 본 것이다.
위에서 최영미 시인도 인용한 바 있는 <새벽 1시에>라는 시는 오래 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마침내! 혼자가 되었군!
이렇게 시작하는 시는
가증스러운 삶이여! 공포의 도시여!
라면서 대중으로부터 분리를 해방으로 보았다. (*댄디즘 dandyism: 대중의 천박함을 경멸하고 고고한 고독을 찾는 주의.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유행)
그에게 시란, 예술이란 무엇이었을까.
인간의 무리, 자연의 욕구를 경멸하는 대신 보들레르는 예술과 시가 악에 물든 인간에게 인간 본래의 존엄성을 회복해준다는 예술의 속죄적 역할을 지향하였다.
하지만 '군중'이라는 글에서 보이는 그의 경향은 과연 보들레르의 마음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다시 한번 의문이 들게 하기도 한다.
다수의 군중과 고독, 이 두 어휘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적극적인 시인에게는 서로 교환할 수 있는 동등한 어휘다. 자신의 고독을 채울 줄 모르는 자는 역시 분주한 군중 속에서도 홀로 존재할 줄 모른다.
시인은 제멋대로 자기 자신일 수도 있고, 동시에 타인이 될 수도 있는 비길 데 없이 훌륭한 특권을 누린다. 육체를 찾아 방황하는 넋처럼 그는 자신이 원할 때 다른 사람 속에 들어간다. ('군중' 일부)
그에게 군중이란 두가지 상태로 인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보통 우리가 아는 사람들의 무리로서의 군중과 (그가 경멸해마지않는) 자유롭고 편파성 없는 지성으로서 다른 사람들 무리 속에 스며들어가 느껴보는 군중이다. 후자는 시인 혹은 시나 예술에 의해 다듬어진 사람들에게 가능하다. 보들레르가 파리의 우울이라고 얘기하며 파리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가 원하는 모습의 파리를 따로 가지고 있었듯이, 그는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군중은 자기가 그 일원으로 있을 때의 군중이 아니라 그 속에 숨어들어가 암행을 즐길 때의 군중이었다.
모순. 이중적. 이율배반적이며 상호보완적.
파리의 화려한 중심 이변에는 파리의 중심에서 밀려난 소외 계층이 있다. 시인의 관심을 끈 것은 화려한 중심이 아니라 밀려난 계층의 파리였다. 늙은 독신자, 낙오자, 잊혀진 자, 병든자, 창녀, 광대. 이들의 파리는 우울하다. 이들에 대한 시인의 연민이 파리의 우울의 정체였을까. 그렇다고 해도 보들레르의 이런 연민의 감정은 그의 시 속에서 연민으로 공감할 수 있게 쓰여졌다기보다 오히려 그 반대의 어휘로 표현된다. '가난뱅이를 때려눕히자'라는 그의 소산문시는 그래서 잘 해석되어야 한다.
이 글의 주석에서 역자는 '폭력에 의한 시인의 치료책이 늙은 거지에게 자존심과 생기를 되찾아준다' (276쪽)고 했다. 그 시대의 순진한 휴머니스트의 주장에 대한 보들레르의 항의이며 동시에 시인 자신의 이상을 담고 있다면서.
파리에서 외로웠던 사람, 겉으로 보이는 경박함과 그 속에 어울리지 않는 자신의 고독을 가난뱅이들, 늙은이, 병든자의 모습에서 발견하고 동일시하며, 자신을 패대기치듯이 그들을 짓밟으며 시로써 포효한 사람.
그의 우울은 보통의 우울과 다르다. 그의 고독은 우리가 마주한 고독과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