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와의 관계가 끝났다고 해서 정말 모든 게 끝난 걸까. 때로는 이별 이후에야 비로소 관계가 자란다. 이별한 남녀의 재회를 다룬 장은진 작가의 신작 『세주의 인사』는 그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용하고 섬세하게, 마치 오래 말리지 않은 꽃잎처럼 눅눅한 감정을 꺼내 보이듯이.

이야기는 스물여덟의 동하가 퇴근 후 낯선 냉장고와 화분, 그리고 ‘세주’라는 이름으로부터 온 메모를 발견하며 시작된다. 냉장고를 열자 그 안에는 얼음 대신 세주가 즐겨 읽던 책들이 가득했다. 동하는 한 권 한 권 읽어나가면서 과거에는 알지 못했던 세주의 단면과 마주하게 된다. 철 지난 계절의 책 속에서, 동하는 세주의 내면을 처음으로, 천천히, 정독한다. 세주가 사랑했던 문장들을 읽어가며 과거의 그녀를 다 아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단어 하나하나를 놓치고 있었음을 그제서야 깨닫는다. 작가의 섬세한 시선과 서정적 문체가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 속에서 "오늘 읽은 책 모두 마음에 스며들었다(p23)" 과 "기분 나쁘지 않은 덫(p23)" 이라는 문장이 좋아 필사를 해보기도 한 시간.
문득 내 곁의 관계들도 어쩌면 아직 다 읽지 못한 책처럼 느껴진다. 이제라도 한 장씩, 천천히 펴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세주는 동하와 6개월간 교제하다 헤어진 지 1년이 지난 인물로, 자신의 물건들을 지인들에게 나눠주고 사라졌었다. 1장 <냉장고를 부탁해>가 동하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2장 <모든 세계의 끝에는> 에서는 세주의 이야기가 서술된다. 세계의 끝을 보고 돌아온 세주는 자신의 물건을 나눠준 지인들의 집을 차례로 방문한다. 동하의 집은 그녀가 방문한 마지막 집으로, "세주는 동하의 집으로 첫발을 내디디며 다른 친구들의 화분처럼 상태가 좋지 않으면 그냥 나오기로 마음먹었다.(p51)" . 집에 들어서자 튼튼하고 아름답게 자란 '문샤인 산세베리아'를 발견한다. 동하가 없는 그의 공간에 잠시 머문 세주는 자신이 몰랐던 동하의 감정과 습관을 되짚는다. 사소한 것들이 그에 대해 말해주는 것들을 비로소 듣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없는 자리에서 서로를 다시 읽는다.
하여튼 동하에게 책과 냉장고를 준 건 대단한 속뜻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의미라면 책보다는 오히려 숨을 쉬고 보살핌이 필요한 화분에 있었다. 생명을 책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그런데 동하가 이토록 훌륭하게 화분을 돌봐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 p56
문샤인 산세베리아는 이야기 속 상징적인 소재다. 동하는 그 식물을 정성껏 돌보고, 마침내 꽃을 피운다.단순한 화분의 개화가 아니었다. 그의 마음, 그녀의 마음, 그리고 관계라는 이름의 무언가가 조용히 변화하고 있었던 것을 상징하는 소재가 아닐까. 문샤인 산세베리아의 꽃말은 '관용' 이다. 꽃말 또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1년 반이 지난 후 재회하게 된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 관계의 본질과 회복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게 된다. '결국 다시 만난다' 라는 드라마틱한 재회의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이의 시간들, 그 공백 속에서 서로를 향한 이해가 자랐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우리는 종종 관계의 중심에서 상대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 사람이 없는 공간, 시간이 흐른 후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세주의 인사』는 그런 부재의 시간을 ‘이해의 시간’으로 바꾸는 과정을 조용히 따라간다. 그런 면에서 제목 속 '인사' 라는 단어는 중의적인 의미가 된다. 이별의 인사이자, 다시 건네는 첫 인사. 작가는 이 ‘인사’라는 짧은 단어를 통해 관계의 문턱에서 문을 열고 닫는 섬세한 손짓을 보여주고 있다.
장은진 작가는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당신의 외진 곳』 등에서 내면을 섬세하고 애틋한 문체로 그려온 작가다. 내 책장 속에는 작가의 소설이 한 권 더 꽂혀있었다. ( 무려 09년 초판 작품! ) 이번 작품에서도 일상의 감정을 담담하게 풀어내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상대의 세계에 다가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일지, 관계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에게 더욱 추천하는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