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모든것 #오정미 #무제
책이 내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낯선 작가의 책을 잘 읽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 번씩 찾아 읽게 되는데, 이 책은 영화 <버닝>의 시나리오를 쓴 오정미 작가라는 것 때문이었다. 물론 출판사 대표인 배우 박정민의 홍보도 컸다. 책에 대한 별다른 정보가 없어, 작가가 시나리오를 쓰게 된 이야기려니 여겼다. 책을 펼쳐보니 작가가 만난 사람들의 ‘인생 영화’에 대하여 말하는 글이었다. 삶이 힘들어도 영화에서 위안을 얻는다. 좋아하는 영화를 몇 번이나 보면서 인생 영화로 남는 것이다. 이유도 없이 아빠에게 맞았던 한 여성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걸어도 걸어도>를 보며 영화 속 아버지를 이해하고, 마치 영화 속에 있는 것처럼 집안을 걸어 다니는 경험을 했다. 이처럼 영화만이 가지는 특별함이 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인생 영화라고 일컫는 것 같다.
인생 영화를 말하라고 했을 때, 자신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삶에서 어떤 순간에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를 발견할 것이며, 영화로 인해 고통을 잊을 수도 있다. 오정미가 만난 사람들이 그렇다. 인생 영화를 말하지만, 살아온 이야기를 하였다. 어머니가, 혹은 내가 경험한 일들을 이야기하고, 그 간극을 영화에서 찾으려 했다.
‘삶과 영화에 대한 고백들’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각자가 살아온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였고, 영화의 소재가 될 법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뮤직 테라피스트로 일하는 어떤 여성의 이야기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에게 전하는 편지글이다. 친구에 대한 질투 혹은 부러움을 표현하고, 병동에 있는 비올라 수녀에게 불러주었던 ‘내 모든 것’. 누군가 나의 음악을 알아준다는 것. 가슴 벅차하던 순간이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깨닫는다.

각자 개인의 것을 이야기하지만 결국엔 우리 모두의 감정이며 경험이다. 수많은 사람이 괴로워하지만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는 걸 타인의 글로 알게 되지 않나. 개인의 감정과 경험은 글을 쓰는 사람에게 소재가 되어 작품으로 변한다. 우리가 영화를 보고 공감하며 감동하는 게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비슷비슷한 일들, 공감할 수 있는 주제, 마치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 않느냐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면 된다.
아주 천천히 읽었다. 에세이를 이렇게 오래 읽은 적이 없다. 글은 촘촘했고, 폰트가 작아 집중하고 읽어야 했다. 타인의 이야기에서, 세상엔 참 다양한 경험을 하며 살아가는 구나. 우리가 살아보지 않은 일이 얼마나 많은가. 최근에 출간되는 책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표지라서 의미 있었다. 무언가 내 글을 채워 넣어야 할 것 같은 다이어리 느낌의 표지 때문일 것이다.
고양이를 키우며 길고양이에게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SNS를 켜면 고양이 관련 글이 보여 사람의 마음을 훔친다. 어떤 시인이 배낭에 고양이 사료를 넣어 가지고 다니며 길고양이들에게 준다는 것을 보았다. 「무법자」편의 은애 이모가 그런 사람이다. 고양이에게 천사 같은 이모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 고양이들을 돌본다. 마음은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불어넣는 것 같다. 구조한 고양이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는 은애 이모의 뒷모습에 경의를 표하는 바다.
영화 <버닝>에 출연한 배우와 감독만 알았지 시나리오 작가는 몰랐다. 오정미 작가가 러시아 문학 번역 작가로도 활동했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알았다.
나의 인생 영화는 무엇일까. 개봉관 영화는 다 챙겨보았던 시절이 있었다. 안 보면 안 될 것 같은. 무언가 놓치는 것 같은 감정이 들었었나 보다. 어느 한 작품을 말하기 어려울 정도다.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고 있어서일까. 맷 데이먼의 본 시리즈도 좋아했고, 톰 크루즈의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도 좋아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주구장창 보았던 영화가 몇 편이나 될까 궁금했다. 키이라 나이틀리가 나오는 <오만과 편견>을 좋아해 극장에서, TV에서 여러 번 보았다. 지금도 좋아하는 영화다. 사랑과 결혼, 인간관계의 보편적인 감정이 녹아있는 작품이었다. 그걸 인생 영화라고 해도 좋겠다.
갈수록 감정이 무디어지는 듯하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우는 일도 줄어들고, 파안대소하는 프로그램도 드물다. 아마도 나이 때문일까. 경험치는 갈수록 쌓이지만,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열정에 빠지는 것도 없다. 그러므로 최근의 영화는 ‘볼 만하다’, ‘재미있다’가 많지, ‘감동적이다’, ‘또 보고 싶다’ 이런 영화가 드물다. 장편소설이나 장편 드라마가 외면을 받고 있는 시대다. 짧은 소설, 짧은 영상을 선호하는 시대에 ‘인생 영화’가 생긴다면 이 또한 좋은 일이다. 그러므로 인생 영화를 논할 수 있다는 건 감정이 살아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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