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주정뱅이 #권여선 #창비
언젠가부터 이 소설이 자꾸 내게 말을 거는 듯했다. 어디를 가든 따라오는 무엇처럼 내 시선에 띄었다. 제목이 주는 마력이 있는 것 같다. 읽지 않고는 못 배길 그런 책 말이다. 책을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가 구매했다. 책탑의 아래쪽에 있다가 연휴에 슬쩍 올라온 책이기도 하다. 드디어 권여선 작가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처음엔 장편소설인 줄 알았다. 책을 펼치고 주정뱅이들의 삶을 말하는 단편임을 알았다. 7편의 단편에서 각자의 삶을 이루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인간의 내면과 그 이면에 있는 감정들은 결코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흔셋의 나이에 결혼식장에서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 수환과 영경이 주인공인 「봄밤」을 보자. 사업 실패와 이혼, 신용불량자인 수환, 교사였던 영경은 이혼 후 양육권을 가졌으나 남편과 시어머니가 짜고 아이를 데리고 이민 가버린 상황에 맞닥뜨린 후 중증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류머티즘 환자인 수환이 입원한 요양원에 아파트를 정리해 입주금을 내고 영경이 들어왔다. 타인의 고통을 제대로 알기란 어렵다. 고통을 참아가며 영경의 음주 외출을 배웅하는 수환을 바라보며 어떤 상황이 와도 상대방을 향한 감정은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 수환이 죽은 후 알코올성 치매로 다시 요양원에 입원한 영경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차라리 잘된 일일 지도 몰랐다. 수환과 영경을 지켜보며 먹먹해졌다. 삶의 바닥까지 내려간 사람이 서로 의지하고 헌신하는 모습에서 무심한 마음을 지녔던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이모」라는 작품 또한 「봄밤」과 비슷한 양상을 띠는 소설이다. 남편에게 큰이모와 외삼촌이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나’가 일주일에 한 번, 월요일 오후 큰이모를 만나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듣는 내용이다. 평생 직장생활하며 가족을 부양했던 이모는 시외삼촌이 도박 사고를 칠 때마다 도와주었다. 자유롭게 삶을 살고자 했던 이모는 편지 한 장을 써놓고 사라졌다. 췌장암 선고를 받고 투병 중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누군가에게 지난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위로받고 싶은지도 몰랐다.
어쩌면 기억이란 매번 말과 시간을 통과할 때마다 살금살금 움직이고 자리를 바꾸도록 구성되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106페이지, 「이모」 중에서)
제목처럼, 작품의 주인공은 주로 술을 마신다. 슬픔과 고통을 잊기 위해, 즐거움 혹은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고 말하지만, 술을 멀리하는 사람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다가 알코올 중독이 되는 사람은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일 수 있다. 소설 「역광」의 주인공도 그런 인물에 가깝다. 신인 작가로 예술인 숙소에 입주했다. 좌담회 때문에 외출했다 돌아와 문을 열고 들어가다가 공용 발코니에 누군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숙소로 들어가 커피잔에 소주를 부어 마시는 모습에서 알코올 중독자일 거로 짐작되었다. 예술인 숙소에 ‘위현’이란 작가가 입주하고 그와 술을 마시며 그가 공용 발코니에 있었던 사람이었다는 걸 알았다. ‘매초 매초 알코올의 메시아가 들어오는 게 느껴집니다’라고 말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글이 안 써지면 술에 의지해 글을 써보려는 작가의 고통과 절망이 느껴졌다. 제목 ‘역광’처럼 비친 그림자에서 상상 속 인물의 흔적을 찾으려는 작가를 비춘 것 같았다.
곧 헤어질 부부와 이별 여행을 떠나는 「삼인행」에서는 그들이 무슨 이유로 헤어지는지 짐작할 수 있고, 박사 과정을 수료한 여성과 헬스트레이너가 만나 헤어지는 이야기인 「층」은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 사랑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임을 알게 한다. 물론 이면의 진실은 나중에 드러나지만 말이다. 반듯한 청년으로 보였던 사람이 내뱉는 말투에서 실망하지 않기란 어려운 법이다. 서로 다른 층위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제목처럼 느껴졌다. 「실내화 한켤레」는 고등학교 시절 이후 오랜만에 만난 세 명의 친구들이 다시 만나 하룻밤을 보내며 과거 헤어진 이유를 찾는다. 관계라는 것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누구 하나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며 모두의 노력으로 관계가 이어지는 것이다. 다시 만나도 다시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 같은 것이다.
권여선 작가의 이름은 익숙하나 작품은 처음이었다. 삶을 관통하는 주제와 내면의 깊이가 묻어난 인물들의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았다. 계속 읽고 싶은 작가였다. 권여선 작가를 제대로 알게 한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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