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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고백하자면, 나는 박연준 시인의 시집을 읽은 적이 없다. 시인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읽을 기회가 없었다고 해야겠다. 이것은 내가 읽은 박연준의 첫 작품. 더군다나 시인이 쓴 소설로 먼저 만났다. 이것 또한 박연준 작가를 알아가는 과정이려니 하고 생각한다. 시인이 쓴 소설을 먼저 읽으며 시적인 문장이 가득한 유년 시절의 한 소녀를 떠올렸다. 지극히 외로웠을, 그러나 루비라는 친구가 있었기에 추억할 수 있었을 여름을 떠올렸다. 무심코 다가왔다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옛친구를 떠올리며 첫사랑을, 첫 이별의 기억에 침잠해 있었으리라.
박연준 시인이 쓴 첫 장편소설이다. 아마 단편이었다면 선뜻 읽으려고 생각하지 못했을 수 있다. 작품을 쓴 순간의 모든 것이 기록되었을 것이므로, 애타게 기다리다 조금 늦은 리뷰를 쓰게 되었다.

종종 유년 시절을 떠올린다. 엄마와 아빠의 기억보다는 증조할머니와 함께 앉아 있었던 장면이 선명하다. 우리 집에 찾아왔던 스님 할머니, 손님들을, 여름의 기억들이 아직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르는 건 그때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일곱 살 소녀 여름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고모의 집에서 자라며 예민한 고모의 시선에 거스르지 않게 책을 필사하며 사촌 겨울 언니랑 지낸다. 겨울이라는 이름을 가져서 고모의 피아노 학원도 겨울 피아노 학원이다. 여름은 갖지 못하는 이름이다. 예를 중요시하는 고모 때문에 하루하루가 길고 피로해 스스로 ‘작은 회사원’ 같다고 말하는 소녀의 여정을 따라간다.
아빠가 젊은 새엄마와 함께 집으로 들어오며 여름의 다른 생활이 시작된다. 여름이 빨간불일 때 건너온 게 루비였다. 루비는 거침없이 다가와 여름을 사로잡았다. 그때부터 여름은 루비에게 다가가고 멈추었으며 또 외면했다. 루비가 여름에게 안녕을 고했을 때 비로소 루비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영원히 내 곁에 머물 거라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 어느 순간 아무 이유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게 사람과의 관계인 것 같다. 때로는 쓸쓸하고 때로는 외로운 시절을 견디며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유년이 시절이라는 것. 유년은 ‘시절(時節)’이 아니다. 어느 곳에서 멈추거나 끝나지 않는다. 돌아온다.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 컸다고 착각하는 틈을 비집고 돌아와 현재를 헤집어놓는다. 사랑에, 이별에, 지속되는 모든 생활에, 지리멸렬과 환멸로 치환되는 그 모든 숨에 유년이 박혀 있다. 붉음과 빛남을 흉내낸 인조보석처럼. 박혀 있다. 어른의 행동? 그건 유년의 그림자, 유년의 오장육부에 지나지 않는다. (80페이지)
어린 날의 여름이 바라보는 루비뿐 아니라 여름 주변에서 느껴지는 여자들의 분노를 말한다. 이를테면 고모와 할머니의 분노다. 할머니는 자기의 분노를 의자에서 하염없이 앉아 있는 거로 풀었다. 고모의 분노는 모아놨다가 한번에 터트렸다. 또한 고모는 내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에 신경을 썼다. 타인이 볼 때는 남부럽지 않은 가족이었으나 생활비를 주지 않은 고모부, 겨울 언니에게만 허락되었던 돈에 목말라했다. 그리고 새엄마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 새엄마, 아빠와 있을 때와는 다정한 엄마였으나, 새엄마도 한 사람의 여자였음을 보여주었다.
시간이 흐르며 루비의 기억은 희미해졌을 테지만, 그럼에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던 건 루비가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여름의 삶에서 사라져 만나지 못한 시간을 ‘찢어진 페이지’라고 명명했다. 루비와 만나지 못했던 시간, 루비의 기억을 떠올리는 작업은 찢어진 페이지를 찾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새엄마가 낳은 아기 학자를 사랑하는 여름에게 새로운 미래를 향한 발걸음임을 알 수 있었다. 기나긴 여름, 그리워지는 겨울. 누군가는 지루하고 괴로울 테지만, 지나간 것은 언제나 아쉬운 법. 오늘을, 이 순간을 잘 살아가자는 말밖엔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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