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실 #한강 #문학과지성사
작년 가을, 이사 준비를 하면서 짐 정리를 시작했다. 아이들이 쓴 오래된 일기장, 그림, 상장 등이 있었다. 들춰봤더니 아이만이 가진 글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걸 보고 웃고, 멀리 있는 아이에게 사진 찍어 보내주기도 했다. 소중한 것을 버리지 못하는 마음.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때의 추억이 깃든 물건이었다. 반면 나의 어렸을 적 추억거리는 없다. 가난한 살림, 수많은 좁은 집을 거치면서 우리의 공책 같은 건 남겨둘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살뜰하게 챙기는 부모여야 가능한 법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첫 책, 문지 에크리 시리즈로 나온 한강 작가의 글을 보고 있으니 감동이 밀려온다. 유년시절에 쓴 일기장들 사이에 ‘시집’이라고 적힌 책자 한 권을 발견하며 글이 시작된다. 썼던 시를 엮은 작가의 첫 작품집이다. 벌써 작가의 싹이 보였나 보다. 사랑에 대하여 고민하고 떠오르는 마음을 글로 쓴 거다. 유명한 시인이 썼다고 해도 믿을 만한 시어다. 아래의 문장을 보라.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10페이지)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문을 비롯해 작품을 펴낸 시점의 마음을 담은 강연, 산문, 그리고 소설의 글감이 되는 메모장, 작가만의 북향 정원을 가꾸는 이야기가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 이로써 다음 작품을 기다렸던 마음을 잠시 달랠 수 있다. 장편을 쓰면 짧게는 1~2년, 길게는 7~8년 동안 쓰는데, 그에 따른 시간과 노력 그리고 고뇌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작품이 나오기까지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걸 독자들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출간된 책 한 권을 휘리릭 읽은 후 다음 작품을 그저 기다린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었다고만 여겼다는 게 독자로서 조금은 미안하다.
집과 텃밭에서 작은 정원을 가꾸고 있다. 이사한 후 전보다 좁아진 발코니에 제라늄을 키운다. 제라늄들도 새집에 적응하느라 힘들었는지 잎을 틔우지 못하고 있었다. 봄이 되자 분갈이를 하고, 영양제를 조금 주었더니 어느 정도 적응 후 잎과 꽃을 틔우기 시작했다. 혹시나 햇볕이 부족할까 봐 집에 있을 때마다 혹은 출근 전에 화분을 이리 옮기고 저리 옮겨주었다. 북쪽 정원을 가꾸는 작가의 산문을 보고 느끼는 바가 많았다. 햇볕이 들지 않은 쪽에 정원을 가꾼다는 것 자체가 독특했다. 작가가 부른 조경사는 거울을 이용해 식물을 키우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거울 몇 개를 들여와 햇볕을 식물에 쏘아두고 햇빛이 움직일 때마다 옮겨주느라 하루를 보낸다는 작가였다. 그 애틋함이 공감되었다. 미스김라일락이 꽃필 때, 단풍나무의 키가 자랄 때, 불두화에 진딧물이 올라 잡아주느라 쪼그리고 앉았을 작가를 그려보았다. 식물이 자라는 과정을 일기로 담아 일상의 소중함과 삶의 통찰을 바라보게 했다. 보살피고 지켜보아야 잘 자라는 인간의 삶처럼 말이다.
지난 주말에 텃밭에 갔더니 한 달 전에 잘라준 장미는 금방 꽃 피울 듯 풍성하게 자랐다. 7월에 피는 목수국 아래 잔가지를 잘라주고 꽃망울이 맺힌 불두화 가지도 정리해주었다. 꽃양귀비는 일주일쯤 뒤에는 꽃이 필 것 같다. 늦은 오후엔 오이, 고추, 참외, 토마토 모종을 심었다. 자연에서 나는 식물과 꽃, 채소가 점점 더 귀하게 느껴진다. 키우는 즐거움이 있다.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그 실에 연결되어주었고, 연결되어줄 모든 분들에게 마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29페이지)
작가는 언어로 말하는 사람이다. 글쓰기로 인생을 껴안아 보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충분히 살아냈다고 표현한 작가의 글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을 것 같다. 하루하루 정원을 지켜보며 자라는 나무를 보는 즐거움, 사회에 일어난 폭력을 글로 풀어내야 하는 고통과 부담감, 그럼에도 작품을 완성하고 출간하는 순간을 기다려온 것들의 감정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폭력의 역사가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작가로서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하는지 폭력에 대처하는 명확하고 명징한 시선이 담긴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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