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제목이 무려 인생이다. 인생, 인생 뭘까. 가끔 쉽게 인생 뭐 있느냐고 말하곤 하지만 그건 체념이지 인생의 본질을 깨달아서 하는 말은 아니다. 인생 모른다.
소설 내용은 중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상실만을 반복하던 개인의 인생,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패왕별희, 마지막 황제, 같은 영화에서 보던 그런 종류다. 전쟁을 겪고,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고, 문화 대혁명이 시작되고, 개인의 삶은 속수무책으로 휘말리고, 뭐 그런 정도. 근현대에 멀쩡한 나라 없었고 한국도 역사의 질곡 심했지만, 예술 작품에서 접하는 중국 역사의 폭력성은 늘 상상 이상이다.
소설 주인공 푸구이는 지주였다가 도박으로 전 재산을 날리는데, 자신의 전 재산을 따간 상대방은 공산주의 정권에서 지주라는 이유로 처형 당한다. 그럼 인생지사 새옹지마구나 역시 나쁜 일은 그냥 나쁜 일이 아니야, 라고 쉬운 교훈을 얻고 말아야 할까. 그러기엔 여전히 그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다. 전쟁에 강제 징집되고, 가족들은 계속 죽고. 자신만 알고 철없던 푸구이가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았을 땐 남은 가족도 없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늙은 소 한 마리뿐.
그런데 모든 걸 잃은 노인이 들려주는 기구한 인생에서 묘한 위안 같은 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그 감정을 엄밀히 말하면 위안은 아니다. 이런 기구한 인생을 보니 내 힘듦은 힘듦도 아니구나, 라는 안도 같은 것도 아니다. 이렇게도 살아갈 수 있구나, 그래도 살아가니까 인생이구나, 하는 체념적 납득이라고 하면 조금 더 정확한 정리일까. 또 한편으론 체념적으로 납득해버리기엔 이건 어쨌거나 살아남은 주인공의 이야기 아닌가. 주인공 이야기에 동하는 건 무의식적으로 나를 세상의 중심에 놓는 사고일지도 모른다. 내가 주인공은 아닌데. 그렇다면 문제는 언제나 주인공 주변인의 인생이 된다. 내 인생은 어쩌면 제 명 살지 못한, 운도 없이 죽어나가는 소설 속 주변인의 그것처럼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회상은 살아남은 자의 특권이다. 일단 평균 수명은 살아내야 한다. 그렇다면 위내시경 검사는 일 년 전 받았으니 빨리 대장 내시경 검사도 받아 봐야 하는 걸까. 책은 잘 읽히는데 정리 안 되는 소회가 느껴지고, 괜히 애늙은이 된 기분이고, 비는 오고, 소주 마시고 싶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