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필립 로스를 읽었다. 한 인간이 몰락하는 이야기일 것을 안다. 그럼에도 읽는다. 역시 비극이다. 르네상스에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있었다면 현대엔 필립 로스의 비극이 있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인간의 몰락, 필연적인 몰락. 필립 로스는 왜 집요하게 인간의 실패와 몰락을 쓰고, 독자는 왜 필립 로스를 찾아 읽을까.
이념이 인간을 유린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분명 이 소설도 크게 보면 그런 궤에 속한다. 매카시즘 광풍에 스러져 간 개인의 이야기 정도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시대의 악 때문에 선한 인간들이 스러져 나갔다,고 말하면 이는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반쪽 사실이다. 그 안에서 실패하고 스러진 인간들 중에서도 적지 않은 수가 오류를 범했다. 그 오류는 인간이라 할 수밖에 없던,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난 이 소설을 개인의 오류가 시대의 오류와 맞물리며 인간을 쓰러트린 이야기로 읽었다. 필립 로스의 몰락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인간이 외면하는 그 자신의 절박한 오류를 끈질기게 밝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속 공산주의자 아이라 린골드는 라디오 스타가 되고, 유명 배우와 결혼하지만 그의 삶은 결국 실패한다. 결혼에 실패하고, 여러 인간관계에 실패하고, 그 자신의 신념에 삶을 일치시키는 데에도 실패한다. 그를 쓰러트린 결정적 한방은 아내의 고발 회고록이지만 이는 그 자신이 쌓아올린 오류들의 결과다. 아내의 배신 이전에 그가 삶의 모든 것을 배신하며 살았으므로. 그렇다면 아이라 린골드의 몰락을 지켜본 독자는 인간의 몰락이 인과율에 따른 필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과연 그럴까.
그의 형 머리 린골드는 균형감 있는 중재자 역할을 하지만 그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그의 아내는 살해당한다. 흑인 아이들을 버리면 안 된다는 교사로서의 신념과 선의가 그의 삶을 배신한 것이다. "종교, 이데올로기, 공산주의 같은 명백한 망상에서 자신을 해방시켜도, 여전히 자신의 선량함이라는 신화는 족쇄처럼 (530)" 남아 그의 아내를 희생시켰다. 인간의 악은 당연히 오류지만, 선의 또한 오류로 귀결되는 이런 불합리가 어딨단 말인가. 독자는 끝내 "삶 자체가 오류다. (533)"라는 처연한 명제를 인정해야 할까? 이런 삶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한단 말인가.
모든 인간이 실패하는, 희망을 찾기 힘든 비정한 이야기를 쓰고 읽는 건 그 몰락 속에 인간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말을 빌려 말하면 이렇다. "몰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다." 소설 마지막 페이지에서 화자 주커먼은 모두 각자의 용광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시대의 광풍 속에서 각자의 용광로 속에 자신을 던진 인간이었다. 우리는 그 삶들을 목도하며 인간을 증명하는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무엇인지 여전히 장담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스스로 몰락한 삶을 인간의 패배라고 단정할 순 없을 것이다.
필립 로스는 작중 문학 교수의 입을 빌려 문학은 "모순을 지우고 모순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 모순 안에 놓여 있는 고통받는 인간을 보는 것 (374)"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그의 문학은 단순한 실패담이 아니다. 인간의 실패에서 인간다움을 찾고 끝내 인간다운 세상이 당도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실패가 인간을 초라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인생을 비난할 순 없어. 한 인간에게서 제멋대로 사회적 지위를 빼앗고 자존심을 깔아뭉개는 기술들을 보면 오히려 인생에 경의를 표해야 하지. (12)" 아, 이번에도 완패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그만큼 기품 있게 인간을 위로하는 작가가 또 있을까.
"그 시절 수많은 미국인이 파멸했지. 그들의 신념 때문에 정치의 희생자, 역사의 희생자가 된 거야. 하지만 내 기억에 아이라처럼 파멸한 사람은 아무도 없네. 그건 아이라가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기로 선택했음직한 미국의 위대한 전쟁터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어. 어쩌면 이념, 정치, 역사 같은 걸 떠나서, 진정한 재앙은 결국 개인의 근저에 자리한 나약한 감상이 아닐까 싶네. 실패가 인간을 초라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인생을 비난할 순 없어. 한 인간에게서 제멋대로 사회적 지위를 빼앗고 자존심을 깔아뭉개는 기술들을 보면 오히려 인생에 경의를 표해야 하지." 1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