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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산다
  • 행복한 그림자의 춤
  • 앨리스 먼로
  • 10,800원 (10%600)
  • 2010-05-01
  • : 6,828

표지 뒷면 작가 사진을 본다. 흰머리와 흰 셔츠, 얼굴의 자연스러운 주름, 그리고 미소. 우아한 늙음이란 것도 있다면 이런 것일 테다. 문체는 화려하다기보단 정갈하고 이야기는 절제됐으니 소설도 작가의 얼굴을 닮는다고 해야겠다. 단편 소설 스페셜리스트로 201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앨리스 먼로의 초기 작품집이다.

 

영미권 단편 소설은 대개 적당한 중간 지점에서 설명 없이 시작해서 밋밋한 결말로 끝난다. 앨리스 먼로의 소설은 이런 전형을 따른다. 묵직한 한방이 기다리는 한국 단편 소설에 익숙해진 독자에겐 이런 구성이 별로 재미없다. 기술적으로 대단한 플롯도 없고, 감탄을 자아내는 미문도 딱히 없다. 특히 1960년대 캐나다 전원생활이나, 가든파티, 프롬 파티 같은 것들을 연상하기 어렵기에 잘 읽히지 않는다는 느낌이 계속 든다. 최근 소설을 모아놨던 <디어 라이프>처럼 가벼운 듯 묵중하게 스치는 맛도 없다. 그래서 종합 판정은 별로냐고? 아니다. 그럼에도 좋다고 말해야 한다. 올드 팝 듣는 사람이 기술적 세련미에 집착하지는 않잖나.

 

단편短篇 소설의 목표 중 하나는 인생의 단편斷片을 잘라내어 벼리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앨리스 먼로의 단편은 이 점에 충실하다. 분량은 요즘 단편보다 조금 더 짧다. 사건을 잘 교직하려 하지도 않는다. 한 가지 결정적 장면을 향해 내딛는다. 소설 속 인물들은 아버지에게 죽임 당할 말이 도망칠 때 울타리를 일부러 열고, 깨진 유리 접시를 괜찮다며 깔깔대며 주우면서 난 왜 안 되는지 묻고, 점점 원생이 떨어져 나가는 피아노 선생님의 자선 파티에서 지적장애아의 그다지 훌륭하지 않은 피아노 연주를 듣는다. 어떻게 보면 실패에 가까운 모습이다. 그러나 소설가는 이것들을 두고 실패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단지 장면으로 제시되고 독자는 그저 목도한다.

 

우리는 타인의 실패를 두고 냉정하고 혹독하게 평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 자신의 실패에 더 혹독하다. 근본적으로 타인에게 쏟을 수 있는 감각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실패를 이해 못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왜 실패했는지 잘 안다. 더욱이 우리에겐 자신을 혹독하게 비판할 수 있는 권리까지 주어진다. 섬세하고 윤리적인 인간일수록 스스로 무너질 가능성이 많다.

 

자신을 과대평가해서 교만해지는 걸 막기 위해 자기 객관화 능력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때론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않기 위해서도 자기 객관화 능력이 필요하다. 자신의 실패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실패를 좀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실패에 면죄부를 주자는 뜻이 아니라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앨리스 먼로의 결정적 장면을 다시 떠올려본다. 진짜 실패인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말 잘 풀어줬다고, 그래도 삶을 챙겨야 한다고, 마살레스 선생님의 볼품없는 파티는 여전히 아름답다고 말이다. 크고 작은 내 실패의 순간을 바라본다. 진짜 실패인가? 별거 아니었던 것도, 어쩔 수 없었던 것도, 지금 생각하면 실패가 아닌 것도 있다. 이도 저도 아니라도 좋다. 스스로에게 타인이 되어보는 경험 자체가 필요하다. 다만 그것이 그런 생각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무모한 여정. 처음이라서였을까? 술기운이 알딸딸하게 올라서였을까? 아니다. 그건 로이스 때문이었다. 사랑을 할 때 어떤 사람은 조금만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꽤 멀리까지 가서 신비주의자처럼 아주 많은 것을 내던지기도 한다. 그 사랑의 신비주의자, 로이스가 이제는 꼬깃꼬깃 구겨지고 추운 모습으로 완전히 자기 안에 갇힌 사람처럼 자동차 좌석 한쪽 끝에 앉아 있었다. 내가 로이스에게 하고 싶었던 모든 말들이 머릿속에서만 요란하게 헛돌고 있었다. 널 보러 또 올게, 기억해, 사랑해 이런 말들을 나는 하지 못했다. 우리 사이에 놓인 공간을 절반조차도 제대로 건너지르지 못할 것 같았으므로. 다음번 나무 앞에서, 다음번 전신주 앞에서는 말하리라 나는 마음먹었다. 그러나 번번이 못했다. 다만 도시에 더 빨리 닿도록 속력을 높여 무섭도록 빨리 차를 몰았을 뿐이다. 15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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