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책이다. 지금처럼 카메라가 완전히 대중에게 보급되진 않았고, 여유 좀 있는 사람들이 카메라 장만해 여행 사진을 찍던 때였다. 사진은 회화와 비교할 수 없게 사실적이고 생생하여 발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널리즘, 예술, 일상까지 그 위력을 전방위적으로 발휘했다. 40년 지난 지금은 스마트폰 시대니 그야말로 1인 1카메라 시대다. 그만큼 사진의 위상은 더 높아졌다. 사진의 현재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 신문을 비롯한 그 어떤 매체도 아니다. 바로 전 세계 7억 명이 사용하는 인스타그램이다. 이곳에선 누구나, 무엇이든 찍어서 전 세계 사람에게 쉽게 전시할 수 있다. "잠깐만, 먹지 마. 아직 사진 안 찍었단 말이야." "정말 예뻤는데 아깝게 사진을 못 찍었어." 이제 사진 없는 일상은 상상할 수 없다. 에밀 졸라는 인스타그램 모르고 죽었겠지만 이렇게 말했다. "어떤 대상을 사진으로 찍어보기 전에는 그 대상을 진정으로 봤다고 말할 수 없다."
사진은 전통적인 회화로부터 기록 수단, 예술로서의 지분을 상당히 뺏어오는데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회화는 그리는데 숙련도와 물리적 시간이 필요하고, 모더니즘 회화 정도 되면 감상하는 데에도 최소한의 예술적 교양이 필요하다. 반면 사진은 기계가 몇 초면 찍어준다. 게다가 사실성은 비교도 안 된다 (그러나 사진의 이런 극단적 사실성이 회화를 사실적 묘사의 강박으로부터 해방시켰다고).
'누구나' 찍을 수 있는 사진은 '무엇이든' 찍기 때문에도 승승장구했다. 사진은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이미지는 무엇인가를 선택해야만 했던 (화가의) 편협함에서 벗어났(134)"기 때문이다. 손택에 따르면 엘리트주의적 순수 예술은 진품과 모조품, 원본과 복제물, 좋은 취향과 나쁜 취향이라는 구분에 의존하는가 하면 특정한 경험이나 피사체에 의미가 있다고 가정한다. 반면 미디어 예술은 민주적이다. 세계 전체가 재료가 된다. 그리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미술은 가치 있는 피사체를 선택해야 하지만, 미디어 예술에 가치 있는 피사체라는 것은 없다. 찍고 또 찍고 그저 선택만 하면 되니까. 사진을 통해서라면 가난하고 지저분한 일상까지 파토스로 느끼게 된다. 이처럼 사진은 "예술이 아니라 예술의 주제[혹은 피사체]가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191)" 말한다.
그러나 여기엔 못내 찝찝한 구석이 있다. 사진의 강력한 장점인 리얼리즘이 우리 세상의 실재the real와 진정 같을지는 의문이므로. 저자는 사진조차도 "예술과 진실 사이에서 흔히 발생하는 수상쩍은 거래(23)"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말한다. 사진도 회화나 데생처럼 이 세계를 해석하기는 마찬가지라고. 쉬운 예부터 생각해보면 이렇다. 카메라 마니아들이 즐겨 찾는 우포늪의 사진엔 거의 항상 조그만 나무배 위에서 노를 젓는 뱃사공이 있다. 사진사들에게 고용된 어부다. 극도의 사실성이 은폐한 조작된 현실일 것이다.
한편, 리얼리즘과 현실의 괴리를 감각의 층위에서 생각할 수도 있다. 가령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휴머니즘 같은 주제의 사진들. 따로 특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인간의 고통을 소재로 삼은 숭고한 사진은 많다. 그러나 사진은 "미학적 경향 [피사체를 미화하는 경향] 탓에, 세상의 고통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의 사진은 그 고통을 중화"시키며, "경험을 축소하고 역사를 구경거리로 변질"시키고, "연민을 자아내는 것만큼 연민을 없애고 감정을 떼어낸다.(164)" 수단 소녀와 독수리, 시리아 난민 꼬마의 죽음, 틱광둑 스님의 소신공양 같은 장면은 분명 고통스럽다. 그러나 사진 그 자체로 평가했을 때 그 고통 이면엔 부인하기 어려운 교묘한 미감 같은 게 있다. 이처럼 사진엔 고통받는 피사체조차 미화될 수 있는 아슬아슬한 위험이 있다. 이는 그의 다른 책 <타인의 고통>의 메시지와 상통한다. 박제된 타인의 고통에서 우리가 숭고함이나 우아한 연민 같은 것을 느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람자의 숭고한 감정과 사진 너머 현실 속 피사체의 고통 사이는 너무나 멀다. 그래서 고통의 관람자에겐 정치의식이 필요하다.
한편 사진이 사실을 배반하지 않지만 괴리감을 일으킬 때도 있다. 바로 나의 리얼리즘이 아닐 때다. 사진 속 타인의 리얼리즘이 내 현실을 침범하는 것이다. 이전엔 전시회나 잡지에서나 그런 감각을 느꼈지만, 지금은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모두가 다른 모두의 리얼리즘에 고통받는다. 며칠 전 어느 기사에선 사용자 정신건강에 최악인 SNS가 바로 인스타그램이라고 했다. 아무리 글로 나 근사한 걸 먹었네, 돈이 많네, 좋은 곳을 다녀왔네, 써도 딱히 실감을 불러오진 않는다. 그저 사진 한 장이면 충분하다. 파리의 우아한 거리에서 비싼 핸드백 든 사진 한 장이면 타인의 현실감각을 공격하기 딱 좋다. 수전 손택 역시 인스타그램 모르고 죽었겠지만, 하여간 이렇게 말했다. 사진이 "이미지와 현실의 틈을 훨씬 더 크게 갈라놓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고 "사진을 경유해 신비롭게 얻게 된 지식(또는 현실의 고양) 탓에 사람들이 각자 이미 현실에서 소외되어 있다고 믿거나 현실의 가치를 격하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 틈 안에서(180)"라고.
70년대 책이지만 수전 손택이 말하는 사진의 윤리학, 현상학이 현시대의 사진 기반 미니멀리즘 SNS의 흥행과 어떤 식으로 맞물리는지 생각하며 읽으면 (생각보다) 재밌다. 이 책 읽으면 꼭 사진이 현실을 배반하는 나쁜 무언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가령 마지막 페이지에서 저자는 못 박듯이 이렇게 말한다. "카메라는 일종의 약이자 병이며, 현실을 전유하고 쓸모없게 만들어 버리는 수단(255)"이기도 하다고. 이미지가 끝없이 범람하고 소비되는 현 세태에서 이런 피로감에 대한 지적은 적확할 것이다. 그러나 항상 엄격한 윤리 감각으로만 살아갈 순 없다. 그게 더 피곤하니까. 저자는 이렇게도 말했다. "삶에서는 모든 순간이 중요하거나, 빛을 발하거나, 영원히 고정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진에서는 그런 일이 발생한다.(126)" 저자는 사진이 현실세계와 부정확한 관계를 맺는다는 맥락에서 말했지만, 나는 이 문장을 긍정적으로 읽고 싶다. 추억은 인간 삶의 중요한 동력이고, 무엇보다 추억을 잘 매개하는 건 사진이니까. 적당한 윤리 감각과 자존감으로 음식 사진이나 셀카 찍으며 재밌게 놀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럼 다들 즐거운 인스타 라이프.
사진은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사진이 재현해 놓은 현실은 그 사진에 충실해지기 위해서 면밀히 검토되고 평가된 현실이다. 1901년, 15년 경력의 아마추어 사진작가이기도 했던 자연주의 문학의 주창자 에밀 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대상을 사진으로 찍어보기 전에는 그 대상을 진정으로 봤다고 말할 수 없다." 사진은 현실의 단순한 기록이기보다는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는 기준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사진은 현실, 더 나아가서 리얼리즘의 개념 자체까지 뒤바꿔버렸다. 13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