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었을 때 딱 편혜영 소설이다 싶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쯤에 있는 그로테스크한 설정, 더럽고 축축한 것의 적나라한 묘사, 배경에 깔린 불안한 정서. 편혜영 좋아한다고 선뜻 말은 안 하지만 싫어하지도 않는데... 이번 소설은 솔직히 별로였다고 말해야겠다. 일단 작가가 그려낸 디스토피아가 너무 현실성 없다. 도시 전체가 쓰레기로 뒤덮이고 시체와 병자의 산 몸이 불타오르고. 끔찍하지만 그대로 받아들여 상상하긴 어렵다. 그런데 그 디스토피아가 어느샌가 멀쩡히 회복되어 버리는데, 이해 안 된다. 그 정도 자정 능력을 갖춘 나라였다면 애당초 전염병으로 인한 디스토피아적 환경이 생겨나지도 않았겠지.
신형철 선생 말마따나 독후의 감을 말하는 데 작품 허물의 기소에 집중하는 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니 이쯤 하고 복기할 만한 지점만 생각해보려 한다. 소설의 초점 화자인 '그'는 현실 도피하듯 외국 파견 근무를 떠났는데 그곳에서도 또다시 현실을 피해 도망쳐야 한다. 전처는 죽었고, 자신은 용의자로 몰리고, 수사를 피해 도피한 현실은 더러운 시궁이다. 그 속에서 그야말로 쥐처럼 살아가는 그는 원래 쥐를 잘 잡는다는 이유로 해외 본사로 파견됐었다. 쓰레기 더미 속에서 버려지고 상한 음식을 찾아먹고, 아무 곳에서나 배설하고, 당연히 씻지도 못하고. 자신이 잘 잡던 쥐보다 별달리 나아보이지도 않는 그가 하수도에서 쥐를 다시 맞닥뜨렸을 땐? 역시 잡을 수밖에. "처음에는 자신이 쥐와 같은 처지라는 게 무서웠고 나중에는 쥐를 잡을 때에만 쥐와 같은 처지가 아니라는 안도를 느끼"기 때문이다. 달리 쥐와 쥐처럼 더러워진 인간으로 한정하지 않아도 이런 역학 관계는 일반적이다. 같은 환경의 타인을 억압하고, 타인에게 고통을 안겨줄 때 맞이하는 우월감과 안도감이 있다. 이런 이유로 같은 곳에 있어도 인간들이 저마다 느끼는 고통의 층위와 정도는 모두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타인에게 느끼는 우월감과 안도감이 인간 악의 근원일 수도 있다. 나는 쥐인가 아니면 쥐를 잡으며 나는 그래도 다르다는 안도감을 느끼는 쥐 같은 인간인가?
편혜영 데뷔 단편집 <아오이 가든>의 연장선상에 있는 듯한 장편 소설이었다. 편혜영 소설을 읽으며 섬뜩함과 불쾌함 자체를 문장으로 즐겨보라는 어떤 평론을 본 것 같기도 하다. 그 말대로 섬뜩함과 불쾌함 자체는 즐길 수 있는데 그것으로 그친다면 소설이 아쉬울 수밖에 없다. 재와 빨강, 조금 아쉽다. 쥐어짜내며 의미 찾아내기 힘들다. 감기에도 걸렸거니와, 감기약의 진정 효과가 세서 영 퉁명스럽게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자가 처방한 약인데!) 다행히 이 소설은 편혜영의 2010년 작품이다. 요즘 그의 소설은 이보다 더 재밌고 생각할 거리도 많다. 그러므로 이 작품만 놓고 작가에게 실망할 필요는 없다. 한국 문단에 이만한 스타일리스트는 드물기도 하고.
"나는 연민은 있어도 관용은 없는 사람이야. 불쌍한 사람은 봐줘도 어리석은 사람은 못 봐주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이거든. 어리석어서 상황을 이해 못하는 건데 사람들은 선하거나 순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일을 망치는 건 결국 그런 사람들이야. 설마 퍼스트클래스 뭐 이런 걸 원하는 건 아니겠지?" 18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