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 전 누나 가슴에 삼천 원쯤은 있는 거예요,라고 회자되는 명대사가 있었다. 원래는 누구나 가슴에 상처 하나쯤은 있는 거예요,라는 대사였다. 배우의 발음 때문에 왠지 우스워져 버렸지만 본질적으론 인간의 마음에 위안을 주는 좋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에서 묘사되는 저지대는 낮고 축축한 습지다. 1940년대 어느 나라나 그랬듯이 당시 인도 역시 격변의 시기였다.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다 총살 당한 동생, 그의 혈육을 잉태한 아내, 동생의 아내와 그 혈육을 구하려는 형. 오랜 시간이 흘러 저지대는 메워지고 그 위로 건물이 올라가지만 저마다의 마음속 저지대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누구나 상처 하나쯤 가지고 살아가듯이 말이다. 읽고 있으면 이 가족들 왜 이렇게 사나,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지 않아도 될 텐데, 하는 마음이 든다.
치유될 수 없는 상처 때문에 영원히 불화하는 사람들, 분명 그런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 소설은 조금 더 깊게 읽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소설가는 이 마음속 '저지대'가 과연 온전히 시대에 의해 입은 상처인가 하고 묻는다. 이야기 후반엔 극적인 반전까진 아니더라도 중요한 윤리적 쟁점이 나온다. 경찰의 총에 맞아죽은 우다얀은 억울한 죽음을 당한 듯 보였지만, 이야기 후반 가우리의 회고 속에서 진실이 드러난다. 혁명의 실천이라는 미명하에 죄 없는 경찰을 죽이는 데 가담한 것이다. 남들이 모르는 우다얀의 죄를 가우리는 안다. 우다얀은 억울하게 희생 당한 것이 아니라 보복으로 죽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런 처벌로 인하여 우다얀의 죄는 잊히게 된다. 지젝이 말했듯 복수와 처벌은 역설적으로 '진정으로 용서하면서 동시에 망각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죽음 자체가 가지는 해방의 성격도 있다. 어쨌거나 이제 우다얀을 비난할 사람도 없고 본인도 죄로부터 영원히 해방됐다.
가우리의 경우는 조금 복잡하다. 가우리는 경찰이 죽음을 당하리라는 불길한 예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경찰의 행동 정보를 감시하여 우다얀에게 넘긴다. 가우리는 우다얀에게 이용당했지만 역시 공범이다. 우다얀은 범죄(Crime)를 저질렀고 보복 당해 그 범죄가 소멸되었지만, 가우리의 죄(Sin)는 그녀 자신만 알기에 누구도 거기서 구해주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적어도 그녀의 저지대는 타자가 또는 시대가 입힌 상처가 아니다. 돌이킬 수 없는 죄와 영원히 구제될 수 없는 죄의식이다.
범죄(Crime)를 저지르지 않고 사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죄(Sin)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난 결코 고백하지 못할 여러 죄를 짓고 살았다고 느낀다. 비겁하지만 스스로 용서하거나 잊고 사는 수밖에 없다. 둘 다 하지 못한 가우리는 자신과 가족의 인생을 일정 부분 망가트렸고, 결국 수바시와 벨라에게 끝까지 용서받지 못했다. 용서를 구할 수 없는 무거운 죄에서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을까? 자신이 할 수 없다면 타인의 관용으로 구원될 수 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자신의 죄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진실함이 있을 때 구원의 계기가 생기지 않을까. 그러나 생각해보면 죄 앞에서 진실하기가 가장 어렵다. 그렇기에 구원 없이 스스로 삶을 뭉개는 사람은 여전히 많을 것이다.
미래는 뇌리를 떠나지 않고 불안감을 안겨주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를 살아 있게 했다. 미래는 자양분이면서 동시에 약탈자였다. 매번 새해는 새 일기장과 함께 시작했다. 일기장은 인쇄되고 제본된 형태의 시계라 할 수 있었다. 가우리는 일기장에 자신의 기분이나 느낌을 기록하지 않았다. 대신 작문의 초고를 쓰거나 금전출납부 용도로 사용했다. 어렸을 때조차도 일기장의 아직 펼치지 않은 각 페이지에는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운, 아직 경험하지 않은 사건들이 들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계단을 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12월이 다시 온다는 증거가 어디 있어? 같은 의문이 일기도 했다. 24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