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이 예전엔 허허 벌판이었다고 한다. 1970년 이전까진 강북 사대문 안이 서울의 중심이었고 그 밖은 논밭에 소달구지나 지나다녔다고. 당시의 인구수나 산업 구조, 전쟁 후 상황 같은 걸 따져보면 머리론 이해되지만 눈으로 지금 강남대로를 보면 전혀 상상되지 않기도 한다. 책은 강남이 어떤 필요에 의해, 어떻게 발전됐는지를 신빙성 있는 사료부터 야사(野史)까지 넘나들며 설명한다. 서울 라이프 십 년도 안 됐지만 그동안 다녔던 동네들을 떠올리며 역사와 합쳐 읽으니 아주 재미난다.
책에 소개된 강남 개발의 이유. "1) 안보 문제 해결을 위한 도심 기능의 분산, 2) 엄청난 개발 가능 면적, 3) 개발을 통한 정치자금 조성, 4) 서울 도심과의 인접성, 5) 자동차 시대의 도래 같은 여러 요인과 조건이 맞물려 시작되었다 (23)" 그럼 어떤 방식으로 개발이 이뤄졌나. 사실 이게 핵심인데 다 말할 수는 없고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초법적 권력을 가졌던 정부가 법을 넘나들며 개발한 것이다. 그러니까 강남 발전의 역사는 한국의 역사 발전의 형식과 그대로 맞닿아 있다. 땅투기도 하고, 판자촌 살던 사람 쫓아내기도 하고, 불도저식 속도전으로 화끈하게 공사하고, 권력자들 치적 홍보용 건물도 짓는 그런 방식. 그래서 성수대교와 삼풍 백화점이 무너지고, 미적 감각이 결여된 치적 건물들이 세워지고, 시민들을 위한 공간은 부족하고. 당연히 "서울 시민들은 편의성과 속도를 얻었지만 대신 서정성과 추억을 잃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134)"
강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모임 장소로도 싫어한다. 그러나 경기도까지 커버하는 대중교통 집결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몇몇 모임은 강남에서 할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서울에 사는 게 아닌데 강남에서 모이면 늦은 밤 어떻게든 경기도민들이 집에 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강남(역부터 논현, 역삼, 선릉...)이란 동네가 와보면 얼치기 맛집밖에 없고, 가격은 비싸고 그렇다. 남자들끼리 선릉이나 역삼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하면 여자친구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거기 왜 가는데! 조용한 이자카야 가려고 그랬는데. 아, 자기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괜히 설명을 더 해야 한다 (왜 역삼, 선릉이 그런 동네가 되어버렸는지도 책에 나온다 ㅎㅎ).
여자 만나기에도 별로다. 10년 전쯤엔 소개팅 나와서 강남역 커피빈이나 지오다노 앞에서 쭈뼜거린 적도 있었지만 ㅋㅋ 그건 소개팅이니 그렇고, 연인들 데이트 장소로는 영 꽝이다. 강남에서 밥 먹고 커피 마시고 뭘 해야 하나. 영화 시간까지 붕 뜨면 DVD방이나 가야 하나. 와우. 미슐랭 식당들이 포진해 있는 청담 같은 델 가면 좋겠지만 그런 부르주아는 되지 못한 관계로 강남은 좋아할 방법이 없다.
하여간 이런저런 이유로 도로만 넓고 왠지 정 없는 강남보단 강북의 아기자기한 동네를 더 좋아할 수밖에 없다. 굳이 요즘 뜨는 연남동이니 망원동이니 하지 않아도 그냥 강북은 사람과 함께 발전한 냄새가 폴폴 나서 정겹다. 이를테면 충정로의 오래된 성요셉 아파트 같은 건물. 지나가다 우연히 보기만 해도 재밌다. 이런 데 커피숍도 있구나! 하며. 차 있으면 밤에 삼청동, 성북동 드라이브하며 보이는 카페 아무 데나 들어가면 분위기 평타 이상이다. 술모임도 종각이나 종로통, 한강 이남이라면 하다못해 영등포 같은 동네가 조금 지저분해도 사람 냄새나고 맛도 있고 그렇다 (여담이지만 영등포 청도 양꼬치 가지 튀김 진짜 맛있으니 기회 되면 한 번 가보시길 ㅋ).
말은 이렇게 하지만 강남 라이프가 부럽긴 하다. 깨끗하고 여유있고. 그저 내가 여유가 안 되고 B급 정서를 사랑하는 인간이라 깨끗한 강남보다 구도심을 좋아하는 것일 뿐이다 ㅎㅎ. 서평은 안 쓰고 잡담만 많이 했네. 여하튼 책은 "앞으로 국가의 권력과 자본의 힘이 아닌 시민들의 힘으로 강남이 보다 '사람 사는 곳'으로 바뀔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하며 마무리된다. 나 또한 그런 마음이다. 강남역에서도 재밌는 데이트를 할 수 있고, 역삼이나 선릉에서도 의심의 눈초리 받지 않고 남자들끼리 만날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길 바란다.
1970~1971년, 영동 지구에서 체비지는 10만 평에 달했다. 그러나 당시 ‘영동‘은 아무런 기반 시설이 없는 허허벌판이어서 여러 특혜에도 불구하고 체비지가 잘 팔리지 않았다. 이를 팔아서 자금을 조달하여 고속도로 건설에 쓸 계획이었는데 투자 가치가 워낙 낮으니 그런 자금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고속도로 건설에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도입된 제도가 바로 그린벨트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독단적인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그린벨트 제도가 도입되면서 개발이 제한된 지역이 생겨났고 그쪽으로 갈 만한 자본이 체비지 쪽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마침 1970년대 중반 중동 붐이 겹치면서 이 체비지들은 모두 팔리게 된다. 이후 그린벨트 제도는 가장 위력적인 환경보호 제도의 하나로 여겨지며 박정희 대통령의 주요 업적으로 언급되곤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고속도로 건설을 떠받치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선의로 시작한 정책이 나쁜 결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그린벨트의 경우에는 정반대였다고 해야 할까? 3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