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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산다
  • 선셋 파크
  • 폴 오스터
  • 11,520원 (10%640)
  • 2013-03-20
  • : 2,595

현대 미국도 경제 때문에 우울했던 적 있는데,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다. 저금리 시절 너도 나도 주택 담보 대출받아서 집 샀는데, 금리가 슬금슬금 계속 올라서 결국 원리금 못 갚는 소시민들이 떨어져 나간 것. 그때 주인 잃은 빈집들이 속출했는데, 소설은 그 빈집을 몰래 무단 점거하여 살아가는 네 명 젊은이의 이야기다. 폴 오스터는 누가 봐도 뻥 같지만 강렬한 이야기가 매혹적이었는데, 이 소설은 아무래도 배경이 실존하던 최근의 경제 위기다 보니 이전처럼 알면서 속아주는 느낌은 덜하다. 현실적 우울함이다.

 

소설은 네 명의 젊은이 이야기 말고도 주인공의 부모와 부모 친구까지, 모두의 내면을 한 번씩 훑고 지나간다. 모두가 각자의 죄의식 속에서 살고 있다. 다만 말을 못 할 뿐이다. 경제 위기는 배경일 뿐 진정 우울한 것은 용서를 구할 수도 없고, 스스로도 용서할 수 없는 내면의 수렁이다.

 

주인공 마일즈 헬러는 피가 섞이지 않은 형과 말다툼하던 중 화를 참지 못하고 그를 차도로 밀친다. 그런데 그 순간 코너를 돌아 나온 차가 형을 친다. 형은 죽는다. 이 과실치사 상황에서 마일즈 헬러가 궁금한 건 단 하나뿐이다. 과연 나는 차가 오는 소리를 듣고 형을 민 것인가? 자신을 믿을 수 없는 그는 스스로를 처벌하듯 세상과 격리되어 살아간다. 부모님은 애타게 그를 찾는다. 7년 만에 아버지를 만난 마일즈 헬러는 자신이 형을 밀쳤다고 아버지에게 고백한다. 자, 우리가 부모라면 마일즈 헬러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형을 밀쳐버린 마일즈 헬러를 평생 미워하며 살 것인가. 마일즈 헬러가 법으로 처벌받지 않았다면 이전처럼 평생 스스로를 처벌하듯 살아야 하는가.

 

죄는 물론 처벌받아야 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던, 예측하지 못 했던 일에 대한 가해자의 죄책감과 피해자의 원한이 영원하다면 모두의 삶은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필립 로스 <네메시스>에선 소아마비 전염에 대한 죄책감에 스스로의 삶을 폐기시킨 남자가 나온다. 장강명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서는 죗값을 치르고 조용히 살아가는 남자에게 끝까지 복수하는 아주머니가 나온다. 영원한 죄책감과 원한의 끝은 비극이다.

 

불행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일일 때, 용서와 망각은 아주 어렵다. 그렇기에 용서와 망각의 논리는 절대적으로 피해자 편에서 나와야 한다. 가해자가 스스로 말하는 용서와 망각은 자신만 편하자는 비겁한 논리일 때가 많다. "저는 신에게 이미 용서받았습니다." 같은 말들처럼. 그러므로 용서의 시작은 가해자 스스로 "일어서서 자기 행동에 책임(326)"을 지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때 우리는 아프지만 겨우 합의할 수 있다. 이제 다신 들추지 않고 살아가자고. 소설의 아버지는 말한다. "더 중요한 것은 <용서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이다. 아마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용서받아야 한다." 잊는 건 여전히 어렵고 완전히 잊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을 유지시켜줄 때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세월이 흘러갈수록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고통과 슬픔이 누적되어 더 많은 고통과 슬픔을 견디는 능력이 약화된다. 그러나 고통과 슬픔은 피할 수 없기에, 말년에는 아무리 사소한 실수라도 젊은 시절의 큰 비극에 맞먹는 힘으로 울릴 수도 있다. <낙타 등을 부러뜨리는 것은 마지막으로 올린 지푸라기 한 가닥이다.> 다른 여자의 질 속에 들어간 멍청한 페니스가 그 예다. 28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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