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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wga님의 서재
  • 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 김멜라 외
  • 6,930원 (10%380)
  • 2024-03-31
  • : 38,994

1. 김멜라의 단편 소설 '이응 이응'은 수용에 관한 이야기로 보인다. 화자는 성 정체성 스펙트럼을 반영한, 심지어 사용자에게 서사까지 부여할 수 있는 섹스 머신 '이응'이 이곳저곳에 공공연하게 설치되어 있는 시대를 살고 있으나 이응에 혹하지 않는다. 이응을 거리낄 것 없이 사용하던 인물은 화자의 할머니고, 화자는 할머니에 관해 덤덤하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런 할머니와 반려견 '보리' 또는 '보리차차'와 함께 하곤 했던 산책을 회상한다. 화자는 우리(We)와 포옹의 줄인말인 '위옹'이라는 모임에 가입한다. 위옹에서의 약속은 여러 개가 있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다른 회원과 로맨틱한 관계도, 성적인 관계도 맺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나는 화자에게 이응이라는 기계가 지나치게 유성애적으로, 그래서 폭력적으로 느껴졌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화자가 결국 이응이라는 기계 속으로 들어갔을 때 느꼈던 것도 성애적인 감각과는 다른 것이리라 짐작한다. 위옹에서 금기시했던 관계를 '마침내' 맺은 것이 아니라 로맨틱한 관계도 성적인 관계도 아닌 수용적인 관계를 맺은 것으로 여긴다. 비를 맞아 덜덜 떨던 개가 모르는 사람의 품에 안기듯 그저 받아들여졌으면 하는 희망으로 수용의 대상이자 주체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소설을 읽으며 여실히 느꼈다. 반려견도, 할머니도 떠나보낸 화자가 위옹과 이응에서 얻은 위안은 상실을 달랠 수 있는 품을 발견함으로써 취해진 것 같다. 소설을 읽으면서 의문이 남았던 것은 과연 이응이라는 기계가 공적 장소에 놓일 정도로 당연하게 여겨지더라도 성범죄율이 줄어들 것인가, 이다. 성범죄는 쾌락보다는 권력 관계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 점을 다룬 문장을 읽을 때 갸웃했다.


2. 공형진의 단편 소설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를 읽었다. 동료가 일터에서 노동을 하다가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자 더 이상 이전처럼 살 수 없게 된 사람과 환경에 관한 사유로 비관도 낙관도 할 수 없게 된 사람이 수영 교습반에서 만나 느릿느릿 수영을 배우며 우정을 나누는 이야기이다.

나는 주인공인 희주와 주호가 왜 교습반에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어리숙하고 배우는 속도가 더 느린지 알 것 같다. 그들은 무언가가 자신들을 향해 엄습하고 있다는 걸 느끼거나 이미 엄습당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은 더 이상 이전처럼 아슬아슬하게 나아갈 수 없다. 경계를 벗어나 굼뜨게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주와 주호는 열심히 배운다. 교습반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응원을 받으며 주희와 주호가 하염없이 헤엄을 치는 장면에서 나는 안도했다. 천천히 헤엄을 치는 그들을 보며 그들의 속도가 왜 느린지 헤아리지 않는 타인들의 존재가 고마웠다. 왜 저러지,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고 그저 그런 사람들도 있으니까, 라며 의아해하지 않는 것도 헤아림의 자세로 보였다. 나도 타인들 중 한 사람이 되어 그들이 유영할 수 있기를 바랐다.


3. 김기태의 단편 소설 '보편 교양'을 읽었다. 학교 선생님인 곽이 고등학교 삼 학년의 선택과목 '고전 읽기'를 맡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줄거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단순하게 이뤄지는 편이지만 선생이 학생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그리고 학생이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관한 생각으로 곽은 긴장한다. 특히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가르치면서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한다. "자본론"을 흥미롭게 생각하고 그 의미를 스스로 깨우치던 학생 은재의 부친이 곽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그로 인해 곽은 교장으로부터 한 마디를 듣기도 한다. "자기 전교조는 아니더라고?" 나는 곽을 향한 다른 선생들의 악의적이지는 않지만 호의적이지도 않은 반응을 기억한다. 그들은 곽이 유별난 선생으로 보이게 한다. 곽은 학생들을 위해 고전을 한 권 한 권 선별하고, 자는 학생들을 깨우지도 않고, 무관심을 헤아린다. 학생 은재는 그런 곽을 '진짜'라고 한다. 곽도 자신의 수업에 집중하고 흥미를 느끼며 스스로 공부할 줄 아는 은재를 '진짜'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이 서로를 향해 '진짜'라고 부르는 이유를 안다. 그건 그들이 고전의 사회적 의의를 간파하고 고전이 현재에 미치는 영향을 진지하게 탐구할 줄 알며 선생과 학생 사이의 교류를 반갑게 느꼈기 때문이다. 은재가 서울대에 합격하면서 곽의 '고전 읽기' 강의는 인기가 좋아진다. 나는 은재가 서울대에 합격하지 않았더라면, 은재의 컨설턴트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괜찮게 여기지 않았더라면 어땠을지 생각해본다. 강의는 동료 선생들과 교장, 그리고 학부모들의 관념 어린 눈길에 폐강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곽이 떳떳한 사람이라고 해도 강의를 진지하게 듣는 소수의 학생들 앞에서 선생으로서의 회의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씁쓸해진다. 학교라는 곳은 왜 그렇게 나른하고 낡았을까.
4. 김남숙의 '파주'는 잊히지 않는 폭력과 혐오, 그리고 수치심에 관한 이야기다. 화자인 '나'와 애인 정호는 어느 날 집 앞에 찾아온, 정호의 군대 시절 후배 현철을 만난다. 현철이 그들 앞에 나타난 이유는 정호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다. 일 년 동안 달마다 백만 원을 입금할 것. 그것이 현철이 요구하는 전부다. 정호 때문에 군대에 있는 동안 죽을 만큼 괴로웠지만 그 정도로라도 보상을 받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정호가 현철하게 가했던 폭력에 관해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정호는 현철을 욕한다. '오타쿠'라며. 그리고 폭력에 경중이 있기라도 한 양 입에 올릴 수 있을 정도의 폭력에 관해서만 말한다. '나'는 정호가 말하는 이야기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정호가 그렇다고 암시를 하지 않았지만 무언가가 더 있다는 것을 안다. 정호가 말을 피할수록 '나'는 피해자 현철의 행동과 특성을 눈에 담는다. '나'는 현철을 연민한다. 나는 소설 내내 정호가 끝내 말하지 않은 폭력의 형태를 생각한다. 그것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일까. 얼마나 수치스러우면 감히 입에도 담지 못하는가. 정호는 왜 현철에게 입에 담지도 못할 짓을 했을까. 그러고도 현철을 왜 시종 '오타쿠'라고 부르며 혐오할까. '나'는 어째서 정호가 휘두른 폭력을 혐오하고 부끄럽게 여기면서도 정호를 떠나지 못할까. 나는 세 명의 인물을 둘러싼 폭력과 혐오, 그리고 수치심이라는 굴레를 본다. 그리고 세 명의 인물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을 떠올린다. 자신이 저지른 짓들을 생각하며 수치스러워하는 동시에 피해자를 혐오하는 가해자의 시선과 가해자를 향한 혐오만큼이나 차오르는 연민 어린 시선의 혼합. 나는 화자인 '나'가 정호와는 달리 왜 현철을 잊지 못하는지 알 것 같다. 현철은 '나'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기 때문이다.
5. 김지연의 단편 소설 '반려빚'은 제목으로 알 수 있듯 주인공 정현이 빚으로부터 해방되기까지를 다룬 이야기이다. 하지만 정현의 해방은 단순히 빚을 갚으면서 이뤄진 것이 아니다. 정현에게 일억육천만 원이라는 빚을 남긴 전 애인 서일과의 완전한 작별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 서일은 차일피일 기한을 늦추며 정현에게 돈을 갚지 않은 데다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정현은 서일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내치지 못했다. 꾸역꾸역 빚을 갚고 스스로를 얕보며 살았다. 나는 서일에게 차용증도 요구하지 않고 가장 친한 친구에게만 고민을 털어놓고 가족에게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말을 하지 못한 정현에게 공감한다. 누군가는 그에게 어리석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어쩌다 빚더미에 뭉개진 채로 살게 되었는지 말하기란, 더군다나 가족에게 밝히기란 어렵다. 가족은 왜 타인 때문에 네가 그 많은 빚을 갚고 있어? 라고 물을 것이 뻔하다. 그러면 동성애자인 정현은 사랑해서, 믿어서 그랬다는 말을 삼키며 차라리 말하지 말걸, 하고 후회할 것이다. 이 소설의 구조는 단순하고 서사도 복잡하지 않다. 그러나 성소수자라는 사회적 약자가 어떤 상황에 노출되기 쉬운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정현이 품고 있는 고통을 헤아리지 못할 수도 있다. 정현의 성격상 타인에게 한껏 의지하거나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지 못하는 것이 일상이지만 그런 성격에 성소수자라는 정체성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해 정현은 사회에서 소외된 채 묵묵히 빚을 갚기 때문이다. 빚으로 말미암아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경우를 떠올리면서.
6. 성해나의 단편 소설 '혼모노'는 가짜, 선무당을 뜻하는 일본어 '니세모노'의 반댓말이다. 화자는 장수 할멈을 모시는 중년의 무당인 '나'이다. 내림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떠나는 음기가 강한 터에서 생활한다. 그런데 어느날 스무 살 즈음으로 보이는 애기 무당이 화자의 맞은편 집에 이사를 온다. 애기 무당이 말하길, 자신이 장수 할멈을 모신다는 것이다. 그 말에 '나'는 놀란다. 근래에 아무리 기도를 해도 장수 할멈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장수 할멈이 정말로 자신을 떠나 애기 무당에게로 간 것인지 의심한다. 나는 이 작품을 끝까지 읽고 나서 생각했다. 역시 소설의 의미는 첫 문장을 책임지는 마지막 문장으로 생겨나는 것이라고. 마지막에 신이 떠난 이래 처음으로 환희에 젖은 '나'는 신을 이긴다. 바닥에 지쳐 쓰러진 채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애기 무당의 당황한 얼굴이 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그리고 애기 무당의 표정 위로 장수 할멈의 얼이 겹쳐 보이는 듯하다. 비록 신은 떠났으나 신을 이기는 '나'는 혼모노다.
7. 전지영의 '언캐니 밸리'는 말 그대로 불쾌감을 자극할 정도로 괴이한 마을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불쾌감을 자극할 정도로 괴이한 느낌은 어느 마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왜소증이 있는 화가 겸 택시 운전사인 '나'를 보며 비장애인들이 느끼는 공포, 택시 승객의 얼굴과 동물의 몸을 합한 그림을 그리는 '나'를 향한 지인들의 혐오감, 함박눈이 내리는 날에도 높다란 부촌 청한동의 꼭대기에 있는 집을 드나드는 여자를 향한 궁금증, 청한동의 꼭대기에 사는 노부부가 그 여자에게 어떤 일을 요구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나'의 의심이 모두 모여 언캐니 밸리를 이룬다. 나는 이 소설에서 언캐니한 감각과 장애가 분리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그 장애라는 것은 장애인 본인이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에게 찍은 낙인을 통해 생긴 관념이 아닐까 한다. 청한동의 꼭대기에 있는 집을 드나들던 여자는 염산 테러로 인해 장애를 갖게 되고 그 사건은 언론에 크게 다뤄진다. 그리고 '나'는 그 사건이 있은 뒤로 여자를 만나지 못한다. 소설 속에서 장애는 장애인이 되는 경계와 함께 그려진다. '나'는 경찰에게 말한다. 키가 작은 것이 장애냐며. 경계에서 '나'는 스스로를 감추지 않는다. 감추지 않는 것을 '장애'로 인식하고 그 인식을 충격적으로 느끼는 것은 비장애인들이다. 반면에 이 소설 속에서 감춰지는 것은 무엇일까. 부촌 청한동의 꼭대기에 사는 노부부가 여자에게 요구한 바는 소설에서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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