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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미학의 대한민국 - 직선들의 대한민국

7살이 넘은 이후로 우리집(정확하게는 내 아빠와 엄마의 가계)이 잘 살아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21살 아파트 입주 전까지 우리집 식구들은 단독주택에 거주해왔다. 게다가 서울에서 가장 낙후된 동네 중의 한 군데인 면목동(http://www.cyworld.com/flyinghendrix/262780)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난 그것을 하나의 저주로 인식하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체질적으로 몸이 약한 나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었는 지에 대해서 잠시 생각하게 되는 기회가 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우석훈의 <아픈아이들의 시대>라는 저작을 읽으면서였다. 아파트라는 공간이 많은 사람들에게 욕망의 공간이고, 어쩌면 도시화된 삶의 양식으로서의 정점(타워팰리스와 來美安 등으로 연상되는)에 위치해있지만, 그것이 실제로는 아토피를 비롯한 생태적 재앙을 동시에 창출하고 있다는 것. 그것을 알면서 다시금 우리 동네에 대해서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다. 또 어쩌면, 여전히 3층을 넘는 골목이 동네 중심 상권에도 잘 없고, 또 대부분의 주거형태가 단독주택이라는 것이 굉장히 아름다운 동네임을 반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최소한 우리 동네 애들이 사회에서 영악한 속물로 살지는 못해도 그래도 순박하게 살고는 있구나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어제(6.19)부로 한반도 대운하에 대한 1차 후퇴 발언이 있었다. "국민이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겠다." 한 켠에서는 시민사회운동의 승리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내심 한편으로 그 주장을 "국민 여론을 다시금 우리편으로 만들면 하겠다는 이야기잖아."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살펴보자면, 한반도 대운하를 떠나서 우리 내면에 깔려있는 '건설미학'에 대한 검토가 절실하다는 것. 우석훈이 <직선들의 대한민국>을 통해서 하려는 말이다.

 

직선들의 대한민국?

한강은 원래 여러가지 지류가 겹쳐져서 만들어진 그런 강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한강을 연상할 때 한강을 건너는 다리들과 넓고 깊은 강의 줄기(직선화된)를 떠올린다. 또 고수부지 등을 떠올릴 것이다. 치수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강이 구성되었다손 쳐도, 이런 직선화의 경향은 비단 한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강남대로를 떠올려보라. 정확하게 사각 바둑판을 연상시키는 도로와 건물의 배치. 인위적으로 배치된 잘계획된 도시. 그것들이 우리가 꿈꾸던 서울의 모습이었을까?

유럽에 여행을 다녀온 이들이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것 중 하나가, 유럽 어느 나라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거리문화이다. 길거리 장터, 길거리 음악가,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가 철학책을 보고 있었다는 둥의 이야기들을 우리는 쉽게 듣고, 또 그렇게 쓰여진 여행에세이를 읽으면서 유럽을 상상하고 다시금 환상적인 그 거리를 욕망한다.

하지만 그 같은 시간에 동대문 시장에서는 풍물시장을 애초 만들어주겠다는 전임 시장의 결정을 번복하고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겠다는 현 시장의 주장과, 그에 맞서서 싸우고 있는 소규모 자영업자들-노점상을 발견한다. 난 이 두 주장 중 누가 더 온당한지의 여부를 가리고 싶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러한 문제들을 볼 때 대다수의 사람들이 떠올리는 심상에 대해서다. 노점상들을 떠올릴 때, 구질구질하고 좀 촌스럽고, 좀 냄새날 듯한 심상을 만들어내고 있지 않는가?
반대로, 그곳에 들어서게 될, 새로운 건물과 잘 정돈된 쇼윈도우등을 떠올리면서 좀 세련된 듯한 심상을 만들고 있지 않는가?

이러한 인식이 모순되면서도 유지되는 곳이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거리문화를 부러워하면서 높은 건물과, 백화점식의 배치, 뉴요커식의 생활패턴을 동시에 욕망하고 있는 사람들의 나라. 세입자의 처지이면서도 자신의 동네가 '멋진' 뉴타운이 되기를 기대하다, 실제로 뉴타운이 집행되어 폭등한 전세값 덕택에 쫓겨나는 영광을 누리는 나라.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어있는 것일까?

 

이성과, 상식, 그리고 미학

표준적인 경제학이 상정하는 전제가 있다. 인간은 합리적이며, 자신에게 최적의 결정을 한다는 것. 물론 정보경제학등을 통해서 반박되고 있지만, 그 주장의 '주관적 속성' 그 자체는 쉽게 부인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모두가 자신에게 유리한 결정을 최소한 하고는 싶어한다는 것 말이다. 즉 '이성'에 기반을 둔 판단을 최대한 한다는 것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그 '이성'이 작동되지는 않는 것 같다. 물론 모든 경우에서 이성이 작동하는 것은 아니면, 나름대로 사회적으로 구축된 믿음 체계, 이를테면 한국에서 돈이 되는 것은 주식보다는 부동산이다. 뭐 이 정도만 되어도 이해할 만하다. '상식'이라 할 수 있겠지.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상식이 작동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상식을 뛰어넘은 이상한 기대심리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2008년 총선에서 서민들의 지구였던 노원병에서 뉴타운 심리로, 대중적으로 굉장히 유망했던 진보정당의 노회찬 후보를 한나라당의 홍정욱 후보가 꺾고 당선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 때의 그 뉴타운 심리라는 것을 추동했던 것은 역설적으로 집도 없고, 빽도 없고, 돈도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에 반하여 뭔가 희망하고 있다는 역설.

그 한편에서 우석훈은 '건설미학'을 발견해 낸다. 무엇인가 계속 건설을 통해서 지어야 하고, 낡으면 때려부숴야하고, 왠지 모르게 새로운 건설사업이 시작되면 경기가 살아날테고, 그러면 자신의 삶의 조건들 역시 개선될 것이라는 믿음과, 그렇게 지어진 건물의 전경을 보면서 사람들이 느끼는 일종의 '아름다움'의 환유. 조감도 한방이면 움직이는 민심까지. 이건 일종의 미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우석훈은 이야기한다.

우석훈이 말하는 것은 대운하에 대한 기술적 논의가 아니라, 대운하라는 '괴물'을 만들어낸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우리 모두는 공범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무죄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새로운 정치의 구상을 위하여

지금까지 한국의 좌파들의 '정치적인 것'에 대한 구상은 구체적 정책을 향해서 진행된 적도 없지만, 동시에 대안담론(그람시가 말하는 진지전(!))을 형상하는 쪽으로는 더 크게 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의 한켠에 다시금 개발주의, 개발미학의 껍질을 벗겨내지 못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태주의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은 있었겠지만, 그건 '정치적인 것'이 아닌 그냥 '환경문제' 자체로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한국의 좌파들은 기존의 사회가 만들어 놓은 도그마들이 쳐놓은 격자 안에서만 춤을 추면서 '전복'을 노래하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근본적인 변환은, 가장 섬세하게 자신의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바라봄부터 시작을 해야하며, 자신의 가장 가까운 것에 대한 변화가 시작되고 그것이 사회적 흐름이 되었을 때 그것은 걷잡을 수 없는 정치의 변화를 추동할 것이다.

우석훈은 그러한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 힘의 중점에 항상 문화를 갖다 놓는다. 문학이 숨쉬면서 세상에 대한 펜을 들고, 예술가들의 예민함이 세상에서 무뎌지고 있는 우리의 생명이라는 것을 다시금 본질적인 것으로 묘사되는 순간. 그 순간이 어쩌면 새로운 세상으로 한걸음 내디딜 수 있는 순간이 아닐까?

좌파는 세상과 부딪히면서 꿈을 꾸고, 그 꿈을 가지고 다시금 세상에서 벼릴 수 있는 무기를 만들어 내며, 그것을 통해서 세상을 차근차근 바꿔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지금까지 우석훈의 저작들은, 보통 우울한 현실, 그 기저에 깔려있는 '지속불가능성', 그리고 정책적 대안의 순이었는데, <직선들의 대한민국>은 오히려 거시적으로 우리가 어떠한 궁극적인 세상을 말해야 하는 지에 대한 대화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저작들과 다르고, 또 최근의 '한국경제 대안찾기' 시리즈와도 차별화 된다.

<직선들의 대한민국>은 자그마한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소망이 한껏 들어있는 저작이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우리들의 세계는 어떻게 펼쳐질 수 있는가? 상상을 멈추지 말아야지. '지속가능한'이라는 말이 지워지지 않을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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