〇 호프 자런, 랩 걸(Lab Girl)(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알마, 2017
이 책을 이루는 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식물의 생장에 관해 쓴 전문성이 가미된 에세이, 다른 하나는 그의 동료 '빌'과 식물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면서 겪은 에피소드들. 그 둘은 씨실과 날실처럼 번갈아가며 이 책의 서사를 이루는데, 독립적이면서도 긴밀하게 얽힌 이야기가 주는 매력이 이 책의 장점이다.
인종(노르웨이 출신), 성별(여성), 성격(비사교적)을 받아들이고 극복해가면서 오직 자신의 수행하는 연구를 향한 열정이 고스란히 담긴 글을 보면서, 연구자로서의 직업의식을 넘어 어떤 '절박함'이 느껴졌다. 그것은 위태로운 상황에 의해 주어진 시련이 아니라 그를 학문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인도해가는 추동이다.
내게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저자가 아니라 그의 동료 '빌'이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나 "모비딕"의 이방인 퀴퀘그처럼 '빌'은 전형적인 인물에서 훨씬 벗어나 있다. 잘린 손가락을 가진 연구자로 그는 오직 연구를 위해 살아가는 인간처럼 보인다. 저자처럼 정규직 교수도 아니고 정식 연구원도 아니지만 빌은 저자의 연구 수행에 있어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다. 마치 빌은 저자의 그림자처럼 빛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캘리포이나, 조지아, 볼티모어, 하와이, 노르웨이까지 그와 함께 한다. 그리고 함께 할 것이다. 자신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든든한 학문적 동료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저자에게 얼마나 힘이 되었을까. 가족이나 일반적인 친구가 해줄 수 없는 영역을 담당하는 빌 같은 친구가 내게도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 메모
- 아버지와 나는 장비들을 꼼꼼히 점검해서 고장난 곳을 고쳤다. 그리고 아버지는 고장 나기 전에 미리 장비를 뜯어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고, 어쩔 수 없이 고장이 나면 어떻게 고칠 수 있는지도 가르쳐주셨다. 무엇을 고장 나게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그걸 고치지 못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그때 배웠다. 19쪽
- 어릴 적에 나는 온 세상이 모두 우리처럼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주로 이사를 해서,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갈구했던 따뜻함과 애정을 마루렇지도 않게 쉽게 나누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무척 혼란스러웠다. 그때 나는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서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모르는 탓에 말하지 않는 세상에서 사는 법을 다시 배워야만 했다. 24쪽
- 이 가루가 오팔(opal)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무한대로 확장되고 있는 이 우주에 단 한 사람, 나뿐이었다. 상상할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는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나, 작고 부족한 내가 특별한 존재가 된 것이다. 나는 나만의 독특하고 별난 유전자들이 모여서 생긴 존재일 뿐 아니라 창조에 관해 내가 알게 된 그 작은 진실 덕분에, 그리고 내가 보고 이해한 그 진실 덕분에 실존적으로 독특한 존재가 되었다. 모든 팽나무의 씨를 강(105쪽)화하는 광물질이 바로 오팔이라는 확실한 지식은, 누군가에게 전화하기 전까지는 나만 알고 있는 진실이었다. 그것이 알 가치가 있는 지식인지 아닌지는 오늘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느꼈다. 인생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그 순간 나는 서서 그 사실을 온몸으로 흡수했다. 싸구려 장난감이라도 새것일 때는 빛나 보이듯, 내 첫 과학적 발견도 그렇게 반짝였다. 106쪽
- 그해 여름 전제를 콜로라도에서 보내기로 한 것은 데이터 수집이 목적이었지만 나는 과학에 대해 가장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실험이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세상이 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해 가을에 나는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여름이 가져온 재난의 잔해에서 새롭게 더 나은 목표를 만들어냈다. 식물을 새로운 방법으로 연구하기로 한 것이다. 나는 식물들을 밖에서부터가 아니라 안에서부터 연구하겠다고 결심했다. 나무들이 왜 어떤 행동을 했는지, 그 논리를 이해하려 노력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내 논리를 당연한 듯 적용하는 것보다 연구에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112쪽
- 나는 빌의 바로 앞에 앉아서 고개를 쳐들고 그를 바라봤다. 빌이 지금 하고 있는 일, 빌이라는 인간, 그리고 그 순간의 모든 것을 똑바로 목격하는 증인으로서 그를 바라봤다. 그곳, 세상의 끝에서 그는 끝이 없는 대낮에 춤을 췄고, 나는 그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닌 지금의 그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를 받아들이며 느껴진 그 힘은 나로 하여금 잠시나마, 그 힘을 내 안으로 돌려 나 자신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도록 했다.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그 부분은 언젠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겠다고 스스로 약속했다. 오늘은 이미 할 일이 있었다. 오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 눈 속에서 춤을 추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287쪽